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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과 백제는 별개의 종족 구성을 하고 있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5>마한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문헌기록(下)
영산강 유역 출토 ‘조족문 토기’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토기 문화를 상징하는 ‘조족문(鳥足紋) 토기’는 새(鳥) 발자국이 선명히 토기 몸체 전면에 새겨 있다. 솟대 신앙이나 조족문 토기를 통해 볼 때 ‘새’가 마한 문화권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지난 호 마한과 관련된 문헌을 소개했다. 이 가운데 몇몇 문헌을 심층 분석해보고자 한다. “삼한의 뿌리는 마한이고,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사료를 다시 살펴보자.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①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②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인데 ①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고,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 ②삼한 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이 사료에서 마한이 한반도 남쪽에 있는 진국의 여러 나라 가운데 ①마한이 가장 강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②삼한의 여러 왕들을 모두 마한 출신이 하였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삼한의 왕을 진한·변한 출신이 아닌 마한 출신이 하였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말하자면 삼한은 사실상 마한의 세력권에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부여계통으로 마한과 다르다

마한이 토착 세력인데 반해 백제는 부여계열의 유이민 세력이 세운 나라임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6세기 초 기록인 ‘주서 열전 백제전’에 “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백제는 선조들이 마한에 속국으로 있었다. 부여의 별종이다.)”라는 기록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백제 건국 초기에는 마한의 소국이었다는 사실과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마한과는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마한과 백제가 분명히 종족 계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서도 알 수 있다.
 
마한은 새, 백제는 사슴을 표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백제와 마한의 종족 계통이 다르다는 사실은, 예맥족의 신앙에서 새(鳥)·사슴 신앙이 분화되어 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다. 반면 마한이나 신라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자주 나오고 있다.

마한이 ‘새’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삼한의 소도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솟대에 새’가 있는 솟대 신앙은 삼한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토기 문화를 상징하는 ‘조족문(鳥足紋) 토기’를 보면 새(鳥) 발자국이 선명히 토기 몸체 전면에 새겨 있다. 솟대 신앙이나 조족문 토기를 통해 볼 때 ‘새’가 마한 문화권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마한을 비롯한 진한 곧 신라도 새 계통인 ‘닭’을 집단의 표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경주를 ‘계림’이라 한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마한과 진한처럼 한반도 남부에서 나타난 ‘새’와 관련된 문화의 표상은 ‘매’를 상징하는 ‘응준’으로 나타났다. 원래 응준은 고려 때 문인 이승휴는 백제의 표상으로 이해하였다. 이승휴 훨씬 이전 선덕여왕 때 준공된 황룡대 9층탑의 찰주본기에도 백제를 ‘응유’라 하여 역시 매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를 ‘응준’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고, 그 사실이 우리 지역 인정도서에 버젓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새’ ‘매’의 총칭으로 쓰는 ‘응준’(鷹準)을 ‘사슴’을 상징으로 하는 백제의 상징으로 살피는 이치에 맞지 않다. 위에서 살폈듯이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확인해준 조족문 토기나 삼한 문화의 상징인 소도 등은 모두 새와 관련이 있어 응준은 오히려 마한, 그 중에서도 영산강 유역 마한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용맹한 사람’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응준’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고 한 기록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마한인은 ‘응준’처럼 용맹스러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역사적 사실로 남아 후세에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응준’은 중국 문헌과 일치하고 있다

또한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역사(役事)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어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이렇듯 마한 사람들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마한인들이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건한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하겠다.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는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마한이 중화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 기록들은 마한의 강성함을 상징적으로 알려주고,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라는 명문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 무렵 것으로 여겨지는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녹유탁잔에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피장자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응준’이라 부르는 마한의 주된 거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응준’은 마한의 표상이었다

차령 이남 여러 곳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고려 충렬왕 원년 설치된 ‘응방’(鷹坊)의 중심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었다. 또한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한다”라고 했다. 이처럼 ‘매’의 산지로 전라도 지역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과 ‘매’의 관계가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전북 진안에서 ‘매’를 이용한 꿩 사냥 전통이 남아 있는 것도, 매와 전라도 지역이 전통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매’ 곧 ‘응준’이 마한과 관련된 상징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마한과 관련된 상징이 선덕여왕 때 백제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백제와 마한의 통합이후 마한 세력이 백제를 대표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 문헌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마한 관련 문헌을 국내외의 사서에 흩어져 있는 관련 흔적과 유기적으로 엮어내고 유적·유물과 연결지어 해석하면 영산강 유역 마한사는 새롭게 빛을 발할 것이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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