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의병사(14)-■ 한말 의병 전쟁과 호남 의병
1896년 구림유생 최병손 단발령에 반발 의병조직

의병 운동으로 이이진 단발령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조선 전역에서는 의병이 봉기했다.

전기 의병-장성과 나주·영암에서 봉기

전기 의병 시기의 호남의병 봉기는 동학 농민전쟁의 후유증이 예상보다 컸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약간 늦었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단발령 직후 대규모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따르기 어렵다. ‘장성 의병’과 ‘나주 의병’ ‘영암 의병’ 등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시행이 결정되고 있었지만 호남 유림들은 단지 국모의 복수를 요구하고 단발령의 부당성을 강력히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는 수준에 있었다. 호남의병을 상징하는 기우만이 올린 상소에서 “단발령을 환수하시고 옛 제도를 회복하시어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팔도에 포고하시오면 통분 망극한 우리 백성이 누구나 전하를 위하여 한 번 몸을 바치려 아니하오리까”라고 하는 데서 국왕의 거병 교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기우만이 거병을 결심한 것은 아관파천이다. 기우만은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전라도 각 고을 향교에 격문을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단발령과 변복령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예안과 안동에서 보낸 통문이 기우만에게 전달되고, 제천 의병장 유인석이 보낸 ‘격고팔도열읍’ 격문도 도착했다. 특히 자신은 북쪽에서 거의하겠으니 남쪽에서 기우만이 거병을 일으켜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유인석의 글은 기우만으로서는 힘이 되었다.

1896년 음력 2월 7일 기우만이 주도하여 장성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성은 노사학파의 본고장으로, 노사의 손자이자 제자인 기우만의 영향력이 컸다.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 의병은 고광순·기삼연·김익중·이승환·기주현·고기주·양상태·기동관·기동재·기동준 등을 중심으로 하여 200명 규모였다. 노사학파의 문인들과 노사가문이 주로 참여하였다.

임란 의병장 김천일을 배출한 나주 유생들은 갑오왜변·을미사변·변복령·단발령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 과정을 부정하고 있었다. 1895년 음력 12월 초순 나주 참서관 안종수가 단발을 거부하는 관찰사 채규상을 위협하여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하고, 순사들을 동원하여 성안에 있는 관리 100여 명의 상투까지 자르자 나주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격렬히 전개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안종수가 군대를 동원하여 군중들을 겨우 해산시킬 정도로 여론이 들끓었다.

기우만의 거병 격문과 홍주의 거병 소식이 전해졌다.(1896. 1. 29) 2월 1일 모여 거병을 논의한 나주 유생들은 이튿날 2월 2일 전직 관리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나주 의병이 결성된 것이다. 나주 의병을 주도한 핵심인물은 김창균·김석현·박근욱 등 향리들이었다. 향리 출신이지만 동학 농민군의 나주 공격을 막아낸 공으로 해남군수로 나가 있던 정석진이 향교 유생들에게 거의를 주장하는 등 나주 의병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의병을 결성한 나주 의병부대는 의병장·중군장·좌익장·우익장·참모·수성장·군무·군량관·서기 등 부대의 편제를 갖추는 등 놀라운 역량을 발휘하였다.

동학 농민군들의 나주 공격을 막아낸 실전 경험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 유생·향리들을 중심으로 100명이 참여하였다. 유생들이 義儒 역할을 주로 하였다면, 향리들은 군무를 주로 맡았다. 나주 의병은 거병과 동시에 친일 관리인 안종수를 처형하였다. 나주 의병은 다른 지역에도 통문을 돌려 의병 봉기의 동참을 촉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함평 유생(김훈)·능주 유생(정의림)·무안 유생(윤창대·오진용)·영광 향리(정상섭) 등 다른 지역 명망가들이 나주 의병에 대거 참여하고 있는 데서 나주 의병이 전라도 전기 의병의 구심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성·나주 의병, 연합 의병부대 결성

부대를 편성한 나주 의병들이 친일관리 안종수를 처단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자, 기우만은 부대를 편성한 지 불과 나흘 만인 음력 2월 11일 장성에서 의병을 이끌고 나주로 왔다. 두 의병부대가 나주향교에 집결한 것이다. 이들이 나주에 집결하자 주위에서 “옛날 임진왜란 때 김건개(천일)는 나주에서 창의하고, 고제봉(경명)은 광주에서 창의했는데, 오늘날 그대들이 본주에서 창의하고 송사(기우만)는 장성에서 창의하였으니 진실로 추앙할 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한다.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장성 의병과 유생·향리로 구성된 나주 의병 사이에 나타날 수 있는 두 의병조직의 이질적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 의병은 ‘호남대의소’, 이학상이 이끄는 나주 의병은 ‘나주의소’로 명칭을 구분하였다. 김천일 사당 터에 제단을 설치한 후 제문을 바친 후, 금성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장성과 나주 의병은 처음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한 읍치의 중심지를 점거하고 북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의병을 해산하기 위해 선유사와 관군이 전주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광주에서 집결하자는 통문을 전라도 각 읍에 전달하고서 장성 의병을 이끌고 광주 객사가 있는 ‘광산관(光山館)’으로 부대를 옮겼다. 그가 부대를 광주로 옮긴 것은 광주가 전라도 각지의 의병들이 집결하기가 쉬운 지리적 이점과 광주 향교의 박원영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박원영은 장성의병 부대를 많이 도와주다 효수되었다. 나주 의병은 러시아 군대·경찰의 방문을 받았다 한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여하고 있던 러시아가 나주 의병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나주 의병의 활동이 중앙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주 의병은 선유사로 파견된 신기선이 해산을 권고하고, 친위대가 압박해오자 2월 26~7일 해산하였다. 광주에 주둔 중이던 장성 의병 역시 28~9일 신기선의 권유로 해산하였다. 2월 말 광주에 집결하기로 한 약속이 무산됨으써 이른바 ‘광산회맹’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병이 해산하자 조정에서는 박원영을 효수하고, 담양부사 민종렬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나주 의병 가담자에게는 더욱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다. 해남군수 정석진은 나주에서 효수되었다. 나주 의병 좌익장을 맡은 김창균 부자도 장성에서 포살되었다. 가혹한 처벌은 나주 지역 주동자들이 신분이 낮은 향리 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당시 신기선을 따라온 안정수가 형 안종수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크게 작용했다.

1895년 나주에 관찰부가 설치되었던 것은, 동학 농민전쟁 때 나주부가 동학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진 것에 대한 포상의 성격이 크다. 반대로 1896년 8월 지방제도가 정비될 때, 관찰부가 나주에서 광주로 옮겨진 것은 나주 의병 전쟁과 관련이 깊다.

최병손, 영암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영암에서는 구림 유생 최병손이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의병을 조직하였다. 구림 대동계 회원·문산제와 열락제 학생·영암 유생들이 참여하였다. 총사 최이익, 부사 신종봉, 선봉장에 조태화를 추대하는 등 조직을 갖추고, “단발령 결사반대! 국모를 죽인 왜놈들은 물러가라!” 등의 기치를 들고 관아로 쳐들어가니 군수 정원성 이하 관리들이 도망갔다. 곧이어 나온 고종의 해산권고 조칙으로 의병 활동은 중단되었다.
<계속>

박해현(초당대 겸임교수)·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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