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3>마한의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문헌기록(上)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는 가야사
며칠 전, 금관가야의 중심지인 경상남도 김해시 대성동고분군(사적341호)에서 일본에서 생산된 청동 화살촉이 무더기로 나왔다는 뉴스가 나왔다. 김해 대성동 고분박물관이 발굴을 주관하였는데 박물관의 북동쪽 평지 3천700㎡에 분포한 고분군 중 108호분에서 일제로 추정되는 청동 화살촉 30여 점이 다발로 출토됐다고 한다. 4세기 무렵 일본의 지배층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유물로 알려졌던 청동 화살촉이 그동안 간헐적으로 출토되었지만, 이처럼 수십 점이 한꺼번에 발견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에 가장 많았던 경우는 2011년 대성동 고분군 88호분에서 나온 5점이었다 한다.
이번 출토유물을 통해 고대 금관가야와 일본 사이에 교역량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대성동 고분박물관 측은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번에 발굴된 청동 화살촉은 108호분 주인으로 추정되는 부부 인골의 머리맡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번 김해 대성동 고분발굴 조사 결과를 보며, 필자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금관가야 시기의 고분들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성동 지역의 유물을 전담 발굴조사하는 고분박물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성동 108호 고분도 금동관 편이 출토된 영암 시종 내동리 1호분(쌍고분)처럼 이미 도굴된 역사를 지녔지만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아직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 지역의 고분 조사에서도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발굴을 해보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 지금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가야지역은 김대중 정부 때는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2천억이 넘게, 이미 상당 부분 복원이 되어 있음에도 가야문화 복원을 외치는 현 정부에서도 수백억의 예산이 투입되어 가야지역의 역사를 조사하여 복원함으로써 가야의 정체성과 지역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 한다. 우리도 가야지역의 발굴조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영산 지중해는 마한역사의 시발점
이미 본란을 통해 여러 차례 강조하였지만 마한이 한반도 고대사의 뿌리이고, 그 중심지가 시종·반남·다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산 지중해 유역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지역이 고대 마한의 중심부라고 하는 사실은 고고학적 유물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영산강 유역에 집중되고 있는 독특한 묘제인 옹관을 비롯하여 영산강 유역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공광구소호와 같은 영산강식 토기 등은 이 지역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특징은 단순히 지역적 특징을 넘어 고유한 정치체가 설정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른바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왕국이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인데,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한때는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을 백제왕이 이 지역 토착 세력에게 하사한 위세품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 지역이 백제에게 복속된 증거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다 최근에는 그 금동관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곳 현지에서 제작된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와 동형의 금동관 편이 인근 시종 내동리 1호분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도 현지에서 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일 것이다.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 공주, 부여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형고분 또한, 이 지역에 명실상부한 독자적 정치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정치체라고 하면 당연히 이 지역에 수백 년 동안 뿌리를 내렸던 마한 세력임을 가리킴이 온당하다.
마한 연맹체는 강력한 중앙집권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대국·소국의 우열관계가 비교적 크게 드러난 변한·진한과 달리, 평야지역에 위치하여 대국·소국 간 세력 차이가 적어 통합작업이 어려운 현실의 반영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강력한 힘을 가진 왕국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약한 왕국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왕국 간에 상호견제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마한 연맹체가 유지 발전되고 있었다.
독자적인 왕국 형성의 학설은 배제되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마한을 하나의 왕국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옥저나 동예처럼 군장사회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초기 국가의 단계로 해석하려 하고 있다. 앞서 본란에서도 필자가 이야기하였지만, 2020년부터 새롭게 서술된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삼한을 옥저·동예와 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이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인식을 하다 보니 4세기 후반 백제가 마한을 복속시켜 역사에서 마한이 사라졌다는 주장이 아직도 버젓이 교과서에 지금껏 수록되고 있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이 지역 마한의 성립 시기를 기원후 2~3세기로 늦추어 잡는 경우도 있다. 그들의 논리대로 말하면 마한사는 불과 2~3세기에 이 지역에 형성된 부족국가로 있다가 백제의 팽창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필자는 본란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마한의 역사적 위치를 설명하였다. 마한은 적어도 기원전 2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800년 넘게 독자적인 역사성을 지니며 정치체를 발전시켰다고 하였다. 그 마한 역사가 뿌리를 내리고 연맹체의 중심지로 발전한 곳은 영산 지중해의 여러 곳이었다 하였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위에서 든 고고학적 증거 외에도 문헌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실제, 필자는 방송 인터뷰할 때, 또는 외부 강의를 통해서 이러한 주장을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워낙 기존의 통설이 강고하게 뿌리내려져 있어 독자들은 바로 돌아서는 순간 과거의 통설로 돌아가는 관성이 있다. 필자는 그 관성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오랜 구각을 깨뜨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마한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지만, 이번에 어렵게 제정된 일명 ‘마한 특별법’도 필자는 두 가지 점에서 우려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대한민국의 지자체에 해당이 되는 법률이지, 우리 지역에 국한되는 법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정말 마한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30년 가까이 마한사에 대해 우리 지역에서 꾸준히 발굴조사를 하는 등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도대체 남은 것이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동안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의 무관심 탓도 크지만 백제의 마한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우리의 책임도 적지 않다. 엊그제 이번 ‘마한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 정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전남도 문화자원과의 과장·팀장·주무관과 특별법 제정과 관련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특별법 그 자체가 아니라 마한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라는 데 의견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그들은 정말 문헌을 통해서도 마한의 실체, 그것도 영산강 유역이 그 중심지라고 하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가를 필자에게 물었다.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 한다.
글=박해현(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