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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아리랑’과 ‘낭주골 처녀’<상>
윤 재 홍

서호면 몽해리 아천출신
연합뉴스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전 경기대 교수(정치학 박사)
전 KBS제주방송 총국장

1971년 초가을이었다. 서울 중구 정동 MBC문화방송 6층 사장실은 매우 분주했다. 이환의 사장이 전북도지사에서 39세에 사장으로 부임한지 한 달쯤 되었다. 이날 회의 안건은 회사 경영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회의 참석자는 박종민 라디오 국장(영암출신), 김포천 드라마 부장(광주출신) 가요담당 장일영 PD등 3명이 참석했다. 이환의 사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사장으로 부임하자 김일태 영암군산악회장(전 영암군수)등 산악회원들이 나를 찾아와 영암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방송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사장은 이어 “학창시절에 시도 썼고 신문기자 출신으로 많은 글도 썼지만 노래가사 작사는 힘이 들었다”며 ‘영암 아리랑’ 노래 가사를 호남 출신들끼리 점검해 보자고 말했다. 이사장은 ‘영암 아리랑’이 한국의 전통민요인 기존 아리랑보다 더 신나고 즐겁게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로 작사했다고 설명했다. 이사장은 특히 지역중심의 전통민요인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 아리랑’ 경상남도의 ‘밀양 아리랑’ 등 우리나라 3대 아리랑과는 구별되고 전통민요가 아닌 대중가요로 새롭게 태어나 온 국민이 애창할 수 있도록 썼다고 설명했다.

이사장은 자신이 낳고 자랐던 서호면 몽해리 아천마을이 있는 서호강 몽해들을 가사에 넣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영암 아리랑’의 후렴 일부분만 수정되었다.

‘영암 아리랑’ 후렴 가사 중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는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의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에서 힌트를 얻어 ‘어사와 데야’로 흥겨운 가요 가락으로 작사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영암 아리랑’ 작사자는 이환의 사장 아호(雅號)인 백암(白岩)으로 했다. 이 회의에서 이사장은 작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나가면 방송사 사장이 자신의 고향을 홍보한다며 타 지역에서 시비꺼리가 될 수도 있어 백암이 자신이라는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이 MBC의 라디오와 TV를 통해 전국적으로 인기가 치솟았다. ‘영암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때까지도 작사자 백암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MBC 사원들조차 나중에 백암이 영암이 고향인 이환의 사장의 아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장일영 음악담당 PD는 작곡은 국내 유명한 고봉산 작곡가로, 가수는 국내 유명한 여성민요 가수로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사장은 ‘영암 아리랑’은 영암출신이 불러야 한다며 당시 가수 하춘화를 지명했다.

하춘화는 1961년 6살에 가수로 데뷔해 장래가 매우 총망된 17살 고교생이었다. 1972년 지구레코드사에  ‘영암 아리랑’을 취입한 가수 하춘화는 MBC 라디오와 TV에 집중 방송되어 가요계에서 큰 인기를 차지했다. 그해 하춘화는 ‘영암 아리랑’을 노래해 MBC가수왕으로 뽑혀 국내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영암 아리랑’은 하춘화가 소녀 때 불러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지구레코드사는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 음반을 제작해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기와 호황을 누렸다.

특히 ‘영암 아리랑’은 가사 내용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당시 하춘화의 뛰어난 창법과 카덴자(cadenza)가 노래의 앞부분에 들어가 눈길을 끌었다. ‘영암 아리랑’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는 부분을 길게 늘어뜨려 부르는 특유한 시도로 다른 가요들과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영암 아리랑’은 월출산에 둥근달이 떠오를 때마다 영암지역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리는 국민가요로 자리를 잡았다



 

윤재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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