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의 송 (사)학산면 광암마을生 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이사 전 농민신문사 사장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공동대표

설화 속 바리데기(바리공주) 이야기

옛날 어느 대왕이 세자(世子)가 15세가 되었을 때 무당에게 세자의 결혼에 대해 물었다. 무당의 점괘는 당년에 결혼하면 7공주를 낳고 그렇지 않으면 세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나왔다. 대왕은 무당의 점괘를 무시하고 당년에 결혼시켰다. 그리고 곧 세자는 왕위를 이어받았다. 신왕의 비(妃)는 무당의 말대로 7명의 공주를 낳았다. 아들을 간절하게 바란 신왕은 화가 나서 갓난 딸에게 ‘바리공주’라는 이름을 써붙여 바다에 버렸다. 거북이 나타나 바리공주를 등에 태워 데려갔고, 바리공주는 용궁에서 자랐다. 15살이 되었을 때 바리공주는 낳은 부모인 신왕 부부를 만났는데, 그때 신왕 부부는 병이 들어 있었다. 무당에게 점을 치니 바리공주가 구해오는 불사약을 먹어야 나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리공주는 저승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만나고 이승으로 나와 신선으로부터 약수를 구했다. 바리공주가 돌아왔을 때는 부모가 이미 죽었으나 죽은 부모에게 약수를 먹여 회생시켰다. 바리공주는 신선과 결혼하여 일곱 아들을 낳고 스스로 무당이 되었다. 그래서 바리공주는 무당들의 수호신으로 추앙을 받아 사령제에는 꼭 모신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코무덤의 영혼을 한국에 모셔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사천군 용현면에 왜군이 쌓은 선진리 성이 있다. 이곳에 코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삼중 스님이 교토 코무덤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항아리에 담아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1992년에는 삼중 스님의 노력으로 전북 부안의 임진왜란 의병 유적지 호벌치 전적지에 코무덤이 이장되어 조성되었다.

삼중스님은 일본 코무덤의 흙을 담아서 사천과 부안에 코무덤을 만들어 봉양했다. 그때 함께한 한국의 노스님이 삼중스님에게 꿈에 현몽한 처녀귀신 바리공주 이야기를 했다. “저 사당 옆에서 처녀 귀신이 나왔다. 귀신의 고향은 전라도 해안가라고 했다. 코가 끊겨서 이대로 갈 수 없다면서 통곡했다. 이름은 김점순이고 나이는 17살이라고 했다. 그는 이 슬픈 한을 풀고 가야하는데 이리는 못 간다면서 몸부림쳤다. 약혼해 놓은 정혼자와 며칠 뒤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왜놈들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내일모레 결혼식을 올려야 하니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잔인하게 겁탈당했다면서 통곡했다.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나를 죽이고 내 코를 베어간 한을 풀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한이 많은 처녀 귀신은 귀신 중에 가장 무섭다.”

삼중스님은 노스님의 꿈 이야기를 듣고 식은땀을 흘렸다고 한다.

위령제의 마지막으로 망자를 위로하고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강강술래 한마당은 지나가던 외국인 관광객도 즐겁게 참석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며 평화를 기원하는 한 마당이 되었다.

한국 강점을 정당화한 한국합병봉고제비(韓國合倂奉告祭碑)

그 다음날 전차를 두 번 환승해서 2시간 정도 걸려서 교토시 사쿄구가미다카노미야케쬬에 있는 미야케하치만궁(三宅八幡宮)에 도착했다. 시골의 한적한 동산에 신사가 있고 바로 입구 큰 나무 밑에 시커먼 석비가 우뚝 서 있다.

이 신사에 있는 한국합병봉고제비(奉告祭碑)는 메이지 천황의 생일 1910년 11월 3일에 맞추어 한국병합의 위업을 내외에 포고하고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비문을 보면 한국병합을 봉축하는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나서 제막했다고 쓰여있다. 실제로 한국병합이 발표된 날 교토에서는 꽃전차가 다니는 등 축하 분위기가 무르익었었다. 원래 미야케하치만 신사는 강력했던 사무라이 미나모토(源)를 모시는 곳이기 때문에 사무라이의 수호신으로서 기능해왔다.

이 궁 근처에는 신라 명신을 모시는 다이운사, 신라의 신인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모시는 세키잔젠인 등이 산재한다. 신라 명신과 적산명신은 신라인이 동북아시아의 해양을 주름잡던 9세기경에 중국의 산동반도 등에 진출한 신라인이 받들어 모셨던 신이다. 소설 <해신>은 이 신을 장보고로 설정하고 그렸다. 세키잔젠인과 다이운사는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아 당에 유학했던 일본의 저명한 승려 엔닌과 엔친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원래 미야케하치만 궁은 진구 황후와 그 아들 오진 천황을 모시는 신사로 전국에 수천 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진구 황후와 오진 천황은 실존이 의심스럽지만, 많은 일본인이 4세기 후반에 일본을 통치한 인물이라고 믿고 있다. 이곳의 미야케하치만 신사는 오진 천황을 가와치(河地) 신왕조를 연 인물, 곧 천황가의 조신(朝紳, 신으로 모시는 선조)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면 왜 한국합병봉고제비를 미야케하치만 신사에 세웠을까? 그 비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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