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2)
곳곳에 숨쉬는 도선의 숨결
도선의 발자취는 이 땅 구석구석에 존재하고 있다.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부분이 윤색되기는 했으나 그의 존재는 천년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민중 속에 살아 있다. 도선이 펼쳐 보인 불국토의 염원을 담은 그 땅은 주로 교화의 장소로 주로 광양과 영암지역에서 활동했지만 경기도 강원도를 비롯 전국토에 그의 존재가 있다.
그동안 도선 연구에 대한 업적들이 많지만 이 가운데 ``불교전기문화연구소``가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산 기슭에서 발견한 ``도선부도``와 김천 청암사의 ``창주도선국사비석``의 글은 획기적인 사건이랄 수 있다.
도선 탐사에 무려 3년간 20여차례의 현지답사를 통해 100여개가 넘는 도선 창건 사찰을 확인했다는 불교전기문화연구소의 활동은 그 동안 도선에 대한 그릇된 시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탐사에 참여했던 이 연구소 최석환 연구실장의 글을 인용해 본다.
도선 출가지를 둘러싼 혼선
도선의 득도처에 대해 논란이 없지 않다. 옥룡사비에는 월유산 화엄사를 득도지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도선이 머리를 깎고 출가득도한 곳이 3곳이나 된다. 다소 혼란스러우나 대체로 영암 쪽에서는 월암사로 주장한다. 그 이유는 영암을 월출산 달라산 등의 지명들이 많고 도선의 출가지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강진쪽의 주장은 다르다.
도갑사에 있는 ``도선수미왕사비``를 들어 도선의 출가 득도처를 월남사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월남사지다. 월남사지에 세워진 진각구사 혜심의 비문을 보면 도선의 탄생설화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은 ¨진각국사 혜심과 도선의 탄생 설화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문도들에 의해 도선과 진각국사 혜심 중에서 자기 문도의 유리한 쪽으로 탄생설화를 짜맞추기로 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최 실장의 주장은 다르다. 당시 도선의 세력판도는 그 당시 왕건이 태봉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여 고려를 건국하였고 고려 건국은 도선국사와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진각국사 혜심의 문도들은 진각국사를 도선탄생의 설화와 비슷하게 윤색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도선 후신으로 표현하는데 근본적 동기가 있다. 도갑사의 ``도선수미왕사비``의 도선 출가지 월남사지로 비정하는 것 또한 혜심의 세력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혜심은 당시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 문도이며 수선사 2세 법손으로 보조 지눌의 제자라는 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세번째 득도처의 주장은 지리산 화엄사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최병헌 교수의 주장이래 학계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 이유는 화엄사와 도선의 스승 혜철선사에게 무설설무법법의 화두를 받고 깨친 스승이었던 동리산 태안사와 인접해 있다는 데 그 근원의 초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자생풍수인가 중국유입인가
그렇다면 1000여년에 걸쳐 우리 사상계를 지배해온 도선풍수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생풍수인가. 아니면 일행선사로부터 받아왔는가. 이 문제를 놓고 학계에서 논쟁이 일고 있다. 문제는 자생풍수로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다. 도선이 풍수를 배우게 된 동기는 그의 비문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지리산 구령의 암자로 이상한 사람이 대사의 앞에 와서 뵙고 말하시길 ¨제가 세상밖에서 숨어산지가 근 수백년이 됩니다. 조그마한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에게 바치려하니 천한 술법이라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 재주 역시 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는 법이 될 것입니다¨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선이 지리산 이인(異人)을 만난 자리가 구례군에 있는 사성암으로 밝혀졌다. 사성암은 연기조사가 창건하고 원효 도선 진각국사 4명의 대사가 수도하였다 하여 사성암이라고 부른다. 이 절에서 바라보면 멀리 잡힐 듯이 다가온다. 그곳이 바로 사도리촌이다. 지리산 이인을 만난다는 그곳이다. 사성암은 오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명 고양이 보살로 불리우는 보살이 50여년간 지키고 있다. 고양이 보살은 고양이 30여 마리를 키우며 사성암을 지키고 있는 산 증인이다.
도선은 지리산 구령(사성암)에서 귀이한 이인의 말을 쫓아 다음날 약속장소로 갖더니 과연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모래를 쌓아 산천순역의 형세를 보여주었다. 돌아본 즉 그 사람은 없어졌다. 그 땅은 지금 구례 경계 사도촌이라고 부른다. 도선은 그후로부터 깨달은 바가 있어 더욱 음양오행의 술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지리산 이인은 누구?
도선이 사도촌에서 만난 지리산 이인은 누구인가. 그들은 유·불·선을 통달한 이인들이다.
예를 들면 선계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도선이 만난 지리산 이인 또한 특이한 인물들이다. 그들을 가리켜 고운 최치원이나 원효,물계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중 물계자가 가장 유력하다. 개운조사 같은 사람도 ``아라한``과를 얻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초월계에 머무르고 있다. 물계자의 경우 그러한 인물이다. 물계자는 도선앞에 나타날 때 수백년이 되었다고 비문은 전하고 있다. 박전지가 쓴 ``용암사중창기``에는 구령의 이인은 지리산 ``산신``이라고 적고 있다.
또 서거정이 쓴 ``필연잡기``에는 도선이 출가하여 입산수련하는데 어떤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지리,음양의 술법을 전수해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최병헌 선생의 주장은 다르다. ¨도선에게 풍수지리설을 전수해주었다는 이인은 혜철이거나 아니면 그 계통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그 까닭은 혜철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한 선승으로 도선의 스승이기도 한데 중국 유학 과정에서 당시 풍미했던 풍수법을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도선과 물계자
그러면 도선은 어떤 인물이길래 수많은 사상이 그 주변에 맴돌고 있는가. 그는 선종의 종지 는 물론 권법과 산천풍수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에도 깊숙히 개입했다. 그러면 그의 풍수법은 누구에게 받았는가. 후대의 기록인 조선사찰사료의 ``도선국사실록``과 ``동국여지승람``등의 자료에 나타난 중국 일행선사에게 산천지리법을 배웠다. 그런데 도선 탐사팀이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도선은 혜철에게 무설설무법법이라는 화두를 참구 5년만에 깨치고 나서 운봉산 토굴과 태백산 바위 앞에서 띠집을 짓고 두타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도선은 구례에 거처를 옮기고 사성암에서 수도할 때인데 이인이 나타나 그에게 산천지리법인 풍수법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이인이 바로 물계자이다.
물계자의 계보는 국선화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국선화랑의 계보는 고운 최치원부터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의 수행처는 지리산으로 선택하고 있다. 지리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며 도인이 탄생의 땅으로 옛부터 불리워왔다.
도선은 물계자에게 풍수지리법과 권법을 동시에 받게 된다. 그동안 물계자를 이인으로 보았던지 선도에 영향받은 인물로 보아왔으나 불교전기문화연구소의 탐사 결과 그는 국선화랑이라는 사실을 찾았다.
그렇다면 물계자 그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물계자는 효공왕 때 활약한 인물로 도선과의 연대차는 무려 800년이나 차이가 나고 일행과의 100년 차도 믿지 못하는 판에 물계자와의 풍수법맥 계승을 어떻게 이었겠는가. 그것은 도선이 물계자에게 풍수지리법을 이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면 시공을 초월하여 생사를 자유자재하는 법이다.
도선과 물계자가 만난 사실은 청학집에 도선과 물계자와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청학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옥룡자 도선은 풍악산(금강산)에서 수도할 때에 물계자라는 위인을 만났다. 그때 물계자는 동안(童顔)에다 피부가 아이와 같으며 물병을 들고 노래하는 데 나이를 물으니 거의 800세라고 하셨다. 그가 바로 지리산 사도리촌에서 만난 이인으로 보고 있다. 그에게 도선은 풍수 도참설과 권법을 익혔다고 한다.¨
국선화랑인 물계자의 법맥 계승은 도선과 원효에게 이어졌다. 그러므로 두 고승은 물계자의 유파라고 청학집은 기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