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3)

 

도선사상

▲ 지난 97년 3월 순천대 박물관팀이 옥룡사지 2차 발굴 때 도선국사의 유골로 추정되는 석함(石函)을 옥룡사지 부도지에서 발견, 관심을 끌고 있다.

도선은 혜철에게 무설설무법법(말없는 말, 법없는 법)의 참된 위치를 깨달았다. 도선이 혜철에게 받은 무설설무법법은 서당지장에 의해 혜철에게 전해졌고 혜철은 불법의 그 오묘한 진리를 도선에게 전했던 것이다.

 

도선은 혜철에게 받은 화두 무설설무법법을 깨치고 나서 그에게 선맥을 이어 받았고 국선화랑인 물계자에게 풍수도참법을 배웠다. 그때가 그는 옥룡산문을 열기 전의 일이다. 이 땅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도선과의 연관을 짓고 있다. 때문에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실로 크지 않을 수 없다. 혜철이 개산한 동리산파의 두타행(頭陀行:철두철미한 청빈한 삶, 봉사하는 삶) 사상과 국선화랑 물계자에게서 풍수도참사상을 잇게 된 도선에게 법력이 높음을 알고 전국에서 그의 제자가 되길 간청했다. 옥룡사비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고 있다.

도선의 법력이 전국에 알려지자 그를 숭배하는 이가 전국에 모여 들었다. 도선은 그가 은거하고 있는 토굴로서는 도저히 대중을 수용할 수 없어 지금의 광양에 백계산 옥룡사라는 절을 세웠다. 도선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경치가 좋은 옥룡사에 와서 쓰러질 지경에 있는 집을 중수하여 옥룡산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옥룡산에 들어온 이래 35년간 산문밖을 나가지 않고 두타행적 수행으로 대중을 교화했다. 그는 스승 혜철국사가 동리산문을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산문 밖을 나가지 않는 것과 같이 35년간을 옥룡사에 머무르면서 수행에만 전념했다. 그의 법력이 높음을 듣고 전국에서 그를 따르는 제자가 수백명에 달했다. 혜철이 펼친 동리산파는 곡성과 광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비보사찰의 폐사
``동문선``에 실린 박전지(朴全之)의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에는 지리산 성모천왕이 도선에게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만일 3암사를 창립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성모천왕은 바로 지리산 성모마고 할매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석상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도선이 말한 3암사는 바로 선암·운암·용암이다. 그런데 이 3대 비보사찰은 폐사되고 말았다. 그것도 선암사만 조선 중기에 중수를 거듭해서 오늘날 존재하나 운암과 용암은 이미 잃어버린 옛터로 변해버렸다.

도선은 옥룡사 이외에 광양 주변에 수많은 절을 세웠다. 그중 그는 운암사에서 주로 수행했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모친을 모시고 살았다는 것이다. 선동마을이라던지 옛 지명에서도 보이듯이 도선은 효행이 지극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다. 운암사가 주목되는 사실은 도선의 법손이 주지를 맡아오면서 불교사에 하나의 큰맥을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운암사는 인근 옥룡사와 함께 865년(경문왕 6년) 도선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운암사가 폐사된 것은 조선 후기 불교사의 법난때 없어져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광양시 옥룡산 추산리 외산마을에 있는 운암사의 중요성과 관련해 광양시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전한다.

¨운암사는 옥룡사와 더불어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20여년간 개성 국청사의 뜰앞에 방치된 최유청이 쓴 옥룡사도선비를 옥룡사 현지에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주지였던 도선의 법손인 지문이 주도하여 옥룡사에 도선의 비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도선의 혼이 서린 옥룡사와 운암사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사원이 쇠퇴해지고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 옥룡사지 주변에는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것으로 전해 오는 동백나무 7천여본이 7ha에 걸쳐 울창한 동백 숲을 이루고 있다.

법손 지문이 옥룡사에 세운 도선의 비는 현존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일제말기까지 도선비는 보존되어 오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도선의 3대 비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용암사는 경남 진주시에 있는 거대사찰로 추정되었으나 폐사된지 오래다. 용암사는 도선비보사찰 중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용암사 중창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 땅 용암사는 처음으로 도선국사를 만나 비로서 400년전에 창건하여 우리 태조를 탄생하게 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후 용암사는 폐사일로에 있는 것을 400년후 무외국통이 주석하면서 재창건에 이르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후 전쟁을 치르면서 용암사는 불타버리고 옥룡사와 마찬가지로 유생들의 소유로 변해버렸다.

3비보 사찰 가운데 선암사는 도선국사가 창하였고 그와 관련된 유물이 많다. 도갑사와 다른 도선국사 진영과 직인통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삼인당 등이 있다. 이 절 또한 정유재란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1824년 해명·남암·익종 스님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말에 나타난 도선은 고려건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3800개의 비보사탑을 세웠던 도선은 선승으로 두타행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고려사가 풍수도참 사상가로 기록을 남긴이래 풍수쟁이로 전락했다. 또한 그에 대한 어록이나 1차 문헌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고려때 지식인 이승휴를 비롯 이규보가 도선국사의 제문을 지어 올릴 정도로 추앙받았다. 도선국사는 분명 동아시아의 불교사를 바꿔 놓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


동리산파 법맥 이은 선승
도선국사가 태어난 영암에서 동리산까지는 먼 거리이다. 도선은 월유산 화엄사에서 출가득도한후 마음속의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가 바로 도력이 높다는 혜철선사다. 혜철은 중국에서 서당 지장의 마지막 법맥을 이은 인물로 당시 그의 법력이 높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졌다. 도선은 동리산 태안사에서 혜철선사가 산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가 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되길 간청했다. 이때 혜철선사는 도선을 바라보면서 ¨어찌 나를 찾음이 늦었는고¨하였다. 그리고 무설설 무법법이라는 화두를 주었다. 이 화두는 일찍이 혜철이 서당지장에게 받고 깨친 화두이다. 이렇듯 동리산문 태안사는 도선의 마음의 고향이다. 또한 그는 동리산파의 하나인 옥룡산문을 개창, 광양 등지에서 끊임없이 중생교화에 힘썼다. 왕건이 나주를 평정하고 후일 왕위에 오른 다음 진상에 황룡사를 지어 도선에게 바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왕건은 훗날 ``훈요10조``를 남겨 모든 사찰은 도선이 창건하지 않은 절은 함부로 짓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곧 모두 도선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찰을 창건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선 또한 고려사가 이용한 하나의 피해자인지 모른다. 그가 세운 옥룡사를 비롯하여 운암사 용암사 황룡사 등 모두 폐사되어 버렸다. 조선시대 승유억불정책을 펴고 있을 때 도선이 세운 터가 명당이라고 해서 유생들에 의해 모든 절이 불타 버리고 그들의 소유화가 되어 버린 것만 보아도 분명하다. 현재의 옥룡사 주변은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높이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지방기념물12호)이 무성하다. 여기에 1925년 건립한 구례 한씨 문중의 영모제라는 다 쓰러질 듯한 제각이 있을 뿐이다. 옥룡사의 폐사는 1918년 발행된 광양군지에 의하면 1818∼1878년 사이에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구례 한씨 문중이 그후 소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구례 청주 한씨는 금계고익(금닭이 쭉지를 틀고 우는 상)이라는 새의 형상을 한 옥룡사를 발견하고 그곳에 무덤을 쓴 것으로 보인다.

옥룡사지에 대한 피해는 풍수가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당했다. 첫 번째 피해는 일본인들에의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지관들에 의해서다. 옥룡사가 폐사된 후로도 풍수가들의 기본답사 코스가 되고 있다. 그것은 금계고익이라는 절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도선국사가 세운 옥룡사이다. 근처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흥미롭다. ¨구례 한씨라는 부자가 있었는데 그 옥룡사가 탐이 나서 그 금닭의 배꼽 부근에 자기 선친의 묘를 썼다¨고 한다. 옥룡사가 풍수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다음부터 수난을 당했다는 한 증거이다.

옥룡사지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원류인 까닭에 불교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학계에서 옥룡사 관련 논문 한편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옥룡산문은 선문의 개창지이다. 고려왕조의 정신적 기틀을 세운 뿌리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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