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 (5)

 

도선과 풍수지리1

풍수지리설은 신라말기 선종의 유행과 함께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행되었다. 또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유학이나 노장사상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면서 크게 발전했다. 나말여초의 사상계에 있어서 가장 큰 줄거리는 불교와 유학이었지만 풍수지리설이 차지하는 부분이 결코 작지 않았던 것이다.

도선이 백계산의 옥룡사에 자리를 잡기 이전의 일이라고 한다. 어느 해 도선은 지리산의 구령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있었다. 그때 이인(異人) 한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인사를 드리고 말했다. ¨제가 세상 물정의 번잡함을 벗어나 깊숙히 숨어 산지가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재주 한 가지가 있어서 스님에게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저의 비천한 재주를 보시려고 한다면 아무날 남해의 물가에서 가르쳐 드리고자 합니다. 이 재주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들을 제도하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남긴 그 이인은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선은 그 이인이 말 한대로 그곳엘 가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그때 그사람이 와 있었다. 그 사람은 거기에 있는 모래를 모아 우리나라의 산과 강물을 입체적으로 나타낸 지도를 만들어 놓았다. 기운이 순조롭게 뻗은 산천의 형세와 거슬러 흐른 형세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입체도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은 또 종적을 감추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없었다.
 

▲ 도선국사가 모래밭에 천하지도를 그려놓고 음양오행을 크게 깨우쳤다는 사도리 마을. 이 마을은 구례읍에서 화엄사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동쪽으로 약 1㎞쯤 가면 왼쪽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그로부터 그는 해가 저물면 화엄사에 가서 자고 날이 밝으면 다시 그곳에 와서 모래지도를 들여다 보며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음양오행의 술을 깨우쳤다. 그래서 그 지방의 사람들은 그곳을 사도촌(沙圖村)이라 불렀다. 구례읍에서 화엄사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동쪽으로 국도를 따라 1㎞쯤 가면 왼쪽의 산언덕 아래에 있는 사도리가 바로 그곳이다.

참선을 닦아 도를 깨쳤다고 하는 선사인 그가 풍수지리설의 대가로도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된 그 첫 출발이 그와 같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그에게 지리술을 가르쳐 주었다는 그 이인은 지리산의 산신령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또 ¨대보살이 세상을 구호하고 사람들을 제도하는 법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 대목으로 보아 지리산의 문수보살이 도선에게 중생구제의 비법을 가르쳤다는 설도 전해진다.

당시 신라의 운세가 기울어져 혼란에 빠져들고 있을 때 지리술을 터득한 도선은 민생안정과 국토통일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 지세를 살피기 위해 국토순례의 길에 나섰다. 그의 발걸음이 백두산에서부터 곡령에 이르렀을 때 마침 송악 밑에 살던 ``왕융``이라는 사람이 새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앞을 지나면서 그는 ¨기장을 심어야 할 땅에다 어찌 삼을 심고 있는고¨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부인이 남편(王隆:태조 왕건의 아버지)에게 알리자 왕융은 저만치 가고 있는 도선에게로 달려가 예를 올리고 그 까닭을 물었다.

도선은 왕융을 데리고 곡령으로 올라가 그 지세와 방위에 맞도록 집을 짓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또 운세에 맞추어 36구(區)의 큰 집을 짓도록 했다. 그리하여 명년에 꼭 성자(聖子)를 낳게 될 것이며 이름을 왕건(王建)으로 지어야 한다고 일렀다. 그리고는 ¨삼가 받들어 미래 삼한의 통합군주인 대원군자 족하에 글을 올림니다¨라고 쓴 봉투 하나를 주었다. 그때가 헌강왕 2년(876)의 일이었다고 한다. 도선은 그 후 왕건이 17세 때(신라 진성왕 7년)에 왕융의 집으로 찾아가서 왕건을 직접 만나 장차 삼한 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인물임을 확인시켜 주고 앞으로의 진로를 가르켜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사실 여부를 떠나 고려가 건국하고 또 후삼국의 난국을 타개하여 통일을 이루고 민생의 안정을 가져오게 한 성주 왕건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도선 특유의 지리설이 갖는 사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선과 일행 스님
이와는 별도로 도선이 당나라에 가서 그곳의 신승(神僧) 일행(一行)으로부터 비법을 전해받아 왔다는 이야기가 따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나라의 일행과 도선을 사제지간으로 전하고 있는 현존 자료 중에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서는 것은 ``고려국사 도선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승려 굉연(宏演)이 지었다는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처음에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에게 배웠다. 일행선사는 삼교(三敎,儒彿道)에 모두 통달했으며 천도와 음양과 산수에 이르까지 정묘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골짜기의 물을 산 위로 끌어 올리고 하늘의 칠성을 항아리 속에 담는 등 묘술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도선이 그러한 묘술을 모두 전해 받았다.

도선이 귀국하려 하자 일행은 도선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고려에 관해 듣기로는 고려의 산천이 그 근본 주산(主山)과 배반되고 거스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아홉 나라(九韓)도 되고 때로는 세 나라(三韓)로 되어서 나라 안에서도 역적이 생기고 밖에서도 역적이 나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는 천지의 혈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생기는 병이다. 백성들이 많이 죽어나고 병에 걸리며 굶주림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내가 이제 산수(山水)의 병을 조화하여 고려나라로 하여금 태평한 땅으로 되게 하려고 뜻을 세웠으니 그대는 지금 고려의 지도를 그려 가지고 오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에 도선은 곧 고려의 산수도를 그려서 일행에게 바쳤다. 일행이 한번 훑어보고 말하기를 ¨산천이 이러하니 어찌 오랫동안 전쟁터가 되지 않겠는가. 옛 성현이 물 다스리기(治水)를 9년동안이나 하였던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우리나라의 산수지도 중에서 3800여 구역을 가려내어 하나하나에 점을 찍으면서 ¨사람의 병이 급박할 경우에는 곧 혈맥을 찾아 침을 놓든지 뜸을 뜨든지 하여 금시에 병을 낫게 해야 한다.
 

▲ 구례읍에서 남쪽으로 약 2㎞쯤 지나 문척면 오산 정상에 있는 사성암. 이곳은 도선국사가 이인을 만났다는 곳으로 구례읍과 사도리를 굽어 볼 수 있는 경승지이다.

산천의 병도 또한 그와 같으므로 지금 내가 점을 찍은 곳에다 절을 짓거나 부처님을 모시거나 탑과 부도를 세우거나 하면 곧 사람에게 침과 뜸질을 하는 경우와 같아서 이름하여 비보(裨補)라고 하는 것이니 어찌 병이 낫지 않겠는가. 세상의 귀먹고 눈먼 무식한 사람이 자만심으로 침과 뜸질을 하지 않으면 곧 사람이 죽게 된다.

비보를 믿지 않고 불교의 절을 파괴하면 곧 국가가 파멸되고 백성들이 죽게 되는 것이 또한 그러하니 이는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후회한들 소용없음을 확트인이와 달통한 선비는 알 것이다¨라고 했다.

이 같은 말을 건넨 일행은 한 통의 서책을 주면서 이르기를, ¨그대는 고려의 청목(송악)아래 살고 있는 왕융이란 사람을 찾아가 이 서책을 주면서 ``명년에 당신은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들이 장차 삼한을 통일하는 임금이 되어 꼭 삼한의 백성들을 구제할 것이다.``라고 하라. 만약에 그러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삼가고 삼가라¨라고 하였다.

도선이 스승 일행으로부터 서책과 분부를 받고 재배하며 그 가르침을 따를 것을 다짐하였다.

당나라를 떠나 고려로 돌아온 도선은 왕융의 집을 찾아갔다. 하늘의 기상을 관찰하고 지리를 살펴본 다음에 ¨이 집에는 명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집 주인 왕융이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었다. 도선이 스승 일행으로부터 받은 서책과 그 가르침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건네주자 왕융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해 하였다. 그때 왕융은 아들이 없어 늘 근심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과연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건(建)이라 하였으니 그가 바로 고려의 태조이다.

이후 도선은 500군데의 비보사찰을 세우게 하였는데 그 때 태봉나라 궁예 왕의 다스림이 어지러웠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했다.

왕건이 왕이 된후 도선을 국사로 봉하였으며 풀 위의 바람같던 삼한을 통일하여 온 나라를 안정되게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전수받는 과정이 너무 신비하게 묘사되어 있어 기록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유청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김관의의 ``편년통록``에는 도선이 당에 가서 일행의 지리법을 받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용비어천가``나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나와 있고 ``조선사찰사료``중에도 도선이 당에 가서 직접 일행으로부터 전수받아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도선과 일행의 관계는 차천로의 ``오산설림``이나 임상덕의 ``동사회강`` 등에서 지적됐듯이 당말기에 해당하는 신라말의 도선과 당중기의 인물인 일행의 관계는 시대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러한 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아마 도선이 일행과 같은 계통의 공부를 함으로써 중국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꼽히는 일행과 한국에서는 이 분야의 시조인 도선이 서로 대비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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