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의 송 학산면 광암마을 生 전 농협중앙회 신용대표이사 전 농민신문사 사장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공동대표

10여 년 전, 일본인 히구마(日隈) 교수와 함께 진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향토사학자 박주언씨로부터 “진도는 평화의 성지로서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항전, 조선시대 정유재란, 개화기 동학농민혁명이 이곳에서 종결되었다. 또 적병인 왜군에게 덕을 베푼 왜덕산(倭德山)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히구마 교수는 일본에 귀국해서 신문에 왜덕산 관련 글을 투고했으며 이를 본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왜덕산의 존재를 일본에 알리는 역할을 했던 히구마 교수와의 인연으로 “왜덕산이 있는 지역의 사람들이 일본에서 열리는 ‘코무덤평화제’에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고, 왜덕산 사람들 33명이 지난 9월 28일 교토의 도요구니(豊國)신사 앞에서 개최된 ‘코무덤평화제’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왜덕산은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에서 죽은 왜군들의 시신을 조선인들이 수습해 양지바른 곳에 묻어줌으로써 생겨난 묘역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코무덤’은 이와 대비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와 무덤을 만들어 그의 공적을 과시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코무덤은 일본의 사가(佐賀), 후쿠오카(福岡), 오카야마(岡山) 현 등에도 있다.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들은 이 코무덤을 정한론(征韓論) 확산의 상징적 장소로 이용했다. 그래서 코무덤 왼쪽에 코무덤 정비의 취지와 조선정벌의 각오를 다진 내용을 담아 대형석물을 세웠다. 코무덤 주변에는 석책이 울타리처럼 둘러 있다. 일본 막부는 조선정벌을 소재로 가부키(歌舞伎·일본의 전통연극)를 만들어 대중이 즐기도록 했다. 그 가부키에 출연한 배우 이름이 새겨진 석책을 코무덤의 울타리처럼 자랑스럽게 두른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의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최경회 장군의 수구가 여기에 함께 묻혀있다는 김문길 교수(한일문화연구소장)의 주장도 있다. 최 장군의 고향 화순에는 장군의 충정을 기리는 충의사가 있는데, 의로운 여인 주논개(朱論介)의 남편이 바로 최경회 장군이다. 어렸을 때 최 장군의 은혜를 입고 곁에서 성장한 논개는 정실부인의 권유로 후실이 되어 남편과 함께 왜군들과 싸웠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남편이 죽자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 기생으로 변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게(毛谷村六助)를 남강변으로 유인해 같이 죽었다. 충의사에 논개를 기리는 의암영각(義岩影閣)이 있다.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진도 왜덕산 사람들은 다시는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함께 바라고 기억하자는 운동의 일환으로 매년 코무덤을 찾아 평화제를 지내왔다. 이들은 코무덤평화제가 사자를 위한 행사로만 끝나지 않고 생명과 평화를 위한 산 자들의 다짐의 축제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평화제가 열린 9월 28일 아침 엄숙한 분위기와 달리 날씨는 마치 400여 년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원혼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쾌청했다. 일찌감치 일어나 호텔에서 걸어 코무덤에 가보았다. 가을바람이 약간 차갑게 느껴지는 가운데 80세를 넘은 할머니가 코무덤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는 코무덤임을 알고 있었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가끔 청소를 한다고 했다. 이웃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을 지금이라도 반성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두 시간가량 진행된 코무덤평화제는 먼저 울림굿으로 판을 열어 정화를 시키고, 천지기원무로 하늘과 땅을 여는 마당이 펼쳐졌다. 또 신들의 슬픈 마음을 달래줄 흥타령,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살풀이춤,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길닦음 춤, 새처럼 훨훨 날아가시라는 학춤, 남은 자들이 새로운 힘으로 힘차게 살자는 진도 북춤, 한국인도 일본인도 모두 어울려 흥겹게 살자는 진도아리랑이 이어졌다. 마지막은 세계인류 평화의 마음을 다지는 어울마당인 강강술래로 장식됐다.

일본인(주로 재일교포)의 ‘임진왜란과 교토 코무덤을 생각하는 모임’은 이번 평화제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위와 자비의 깊이를 강조하려고 1592년 9월 28일 교토 오산(五山)의 승려 400명을 동원해 이 무덤에서 시아귀공양(施餓鬼供養·무연고 행려자의 죽은 영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을 행했다. 우리(임진왜란과 교토 코무덤을 생각하는 모임)는 1995년 이래 매년 9월 28일 코무덤 경내에서 희생자를 위령·공양·추도하는 행사를 해왔다. 유사 이래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상호 선린우호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코무덤이 상징하는 불행한 관계와 비정상적인 관계도 역사의 엄연한 현실이다. 다시는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이 무덤을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제까지의 활동을 통해 축적한 지적·인적·물적 자산을 보다 크게 하면서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민족과 국적, 종교 등의 차이를 넘어 코무덤을 기점으로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더 많은 사람과 연대해 나가야 한다는 뜻을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화제가 진행되는 내내, 필자의 머리에는 떠나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같은 유교문화권이고 인접국인데, 산 사람의 코를 베어서 전승기념으로 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토록 무자비한 적국 병사의 시체를 수습해서 덕(德)을 베푼 이들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필자는 일본에서 몇 년 생활했고 농촌 곳곳을 찾아 여행도 많이 했기에 일본인 지인들이 다양한 분야에 있다. 또 그들의 역사도 약간은 알고 있는데, 이번 행사에 참여한 감회는 너무나 착잡하고 무거워서 여러 날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의 잔인함과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증오와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다. 현대처럼 동물까지도 복지를 이야기하는 시대가 아니었다지만, 어떻게 그렇게 인간이 잔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가해자의 사당 앞에 자랑스럽게 무덤을 만들어 두었으며, 그들의 후손인 지금의 일본인들은 모르는 체 할까?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서 “이비야(耳鼻爺), 이비!”와 “눈 깜짝하는 사이 코 베어간다. 정신 바짝 차려라.”라는 말씀을 자주 들었다. 이 말들은 단순히 위험하다는 뜻 그리고 정신 차려야 한다는 뜻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조선 사람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상자에 담아 일본에 가져간다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이 말이 민초들 사이에 잊지 말자는 뜻에서 400여 년 동안 말에서 말로 전해져 왔으나 우리는 과연 선조들의 그 정신을 기억하고 실천했는가? 지금 현재는 어떤가? 너무나 안타깝고 참을 수가 없었다. 산 사람의 코를 무자비하게 베어가는 그들의 행위를 증오하고 정신 차리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후손에게 남겨준 것을 이제야 이해하는 우를 범했다는 자책감이 들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며칠간 잠을 설친 것은 필자만이 아니고 평화제에 참석한 한국인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유덕유린(唯德有隣·덕이 있어야 이웃이 있다) 철학이 종교적인 명령이라고 여겨졌다. 공자의 철학인 유교를 우리는 종교로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퇴계 선생과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된 영광출신 강항(姜沆)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유교철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였던 데서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였다.

강항 선생은 1600년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한 후 ‘간양록’(看羊錄)에 이렇게 기록했다. “왜인들이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다른 나라와 통교하는 것을 좋아하며 멀리 떨어진 외국과 통상하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깁니다. 외국상선이 들어와도 사신행차라고 하고, 교토에서는 남만 사신이 왔다고 왁자하게 전하는 소리를 거의 날마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소중한 정보를 조선의 지도자들은 왜 소홀히 했는지 아쉽다.

도요구니 신사에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바로 앞에서 전개되는 이색적인 북춤·학춤·사물놀이 등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인접한 오사카에는 총영사관이 있는데도 언제나 모른 체한다고 한다. 많은 피해가 있었고 결사항전을 해서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지역, 그래서 이충무공이 우리 선조님께 보내는 편지에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썼던 편지문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전남의 지자체 모두도 모르는 체 한다.

때마침 6·25전쟁 때 순절한 병사들의 유골이 하와이까지 운구되었다가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행사가 공항에서 열려 문재인 대통령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모시는 장면이 보였다. 정말 감격적이고 울컥했다. 그러나 420년 전 전쟁이 끝났건만 조선인들의 코와 귀의 영령은 왜 못 돌아오는 것인가? 황천을 떠도는 영혼이라도 타향이 아니라 고향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단체가 함께 왜덕산의 덕(德)과 교토 코무덤의 소리를 듣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영원한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한다. 왜덕산 사람들의 ‘코무덤평화제’에 참여한 33명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심정으로, 각자 마음속에 과거를 잊지 않되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 지향적으로 그리고 우리가 먼저 덕을 베푸는 심정으로 한일 관계를 개선해 나가는데 앞장서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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