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 (6)
도선과 풍수지리Ⅱ
원래 풍수지리설은 지리와 인생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인문지리학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설명 방법에 있어서 양자는 현격하게 다른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즉 인문지리학에서는 지리와 인생과의 관계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반해 풍수지리설에서는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문지리학에서는 지구표면의 자연현상과 인간생활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반해 풍수지리설에서는 지표의 아래에 흐르는 ``地氣``라고 하는 무형적인 힘과 인간 생활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말해 풍수지리설에 있어서는 토지에 일종의 ``신비력``을 인정하고 그 힘이 인간에 미치는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비력이라고 하는 것은 음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의 기로써 동양고대 과학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설에 있어서도 그 이론의 근거가 된 것은 음양오행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풍수지리설이 음양오행설의 영향을 받아 추상적으로 이론화되기 이전에는 인문지리학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게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이다.
풍수지리설에서 길지(吉地)를 상(相)할 때에 그 기본적인 관점은 △산 △수 △방위의 3가지 조건으로 풍수지리설의 구상은 이 3자의 조합된 것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3자는 풍수지리설에만 국한되는 요소가 아니고 인간생활에 있어서 결합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었다.
따라서 풍수지리설이 도입되기 이전에도 거주지를 선정함에 있어서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산에 거하고 수에 임하여 햇빛이 잘 드는 방위를 갖춘 장소가 문제가 되었다. 이로써 나라가 새로 만들어질 때는 개인의 주택이나 한 부족의 정착지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도를 건설하고 그 국도를 중심으로 행정조직의 설치와 도로망의 연결에 자연지리적 조건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재래적 인식은 그대로 풍수지리설 도입의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이며 풍수지리설은 재래의 지리적인 인식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에따라 풍수지리설에 있어서 신비적인 요소만 제거하고 나면 그것은 훌륭한 인문지리학의 일종으로서 볼 수 있는 것이며 후세에 와서 신앙화된 풍수지리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게 일부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이다.
인문지리학의 일종
이미 전술한바와 같이 도선은 신라하대에 새로 도입되어 당시의 불교계에 신기풍을 일으키고 있던 선종 계통의 승려로써 선문구산파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의 인가를 받아 광양의 옥룡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도선은 고려이후 선승으로서 보다는 풍수지리설의 대가로서 더 알려져 왔다.
중국의 풍수지리설이 음양오행설의 채용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때부터다.
그러나 보다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은 당대에 이르러서였다.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연관되어 언급되는 일행은 밀교 계통의 승려로서 장설과 함께 역상음행오행설에도 정통했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당 개원 16년(728) 현종의 칙명으로 연국공 장설 및 승 홍사와 함께 동진시대 곽업의 ``금남경`` 주석을 시도할 때에 실증법을 구사함으로써 이후 풍수지리설의 광범위한 유포에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특히 일행은 개원 12년(724) 칙명에 의해 남은 교주로부터 북은 철륵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위도를 측량하여 ``율력지``에 편입된 대연력을 저술했다. 또한 ``천문지``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 전체를 지세에 따라 화식지지(貨殖之地) 등 3대 부분으로 나누어 자연환경을 관찰했던 극히 과학적인 사람이었다는 평가다.
이것은 동양 고대 과학의 한 특성인 신비적인 요소만 제거하면 천문학이나 인문지리학 등 훌륭한 과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학문의 계통을 습득한 사람이 도선이었다면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당시 신라 국토의 자연환경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도선이 사망하고 고려에 들어와 태조 왕건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이후에도 고려왕실이나 다른 정치 세력들에 의해 이용되는 과정에서 윤색되거나 여러 가지 전설이 붙어서 미신적인 풍수 도참설로 변했던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치적 이용 구별돼야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본국에서 선종을 전수한 다음에도 당의 선승으로부터 다시 인가를 받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그리고 선종에서는 교종에서와 같은 경전이 없는 대신 면수(面授)를 중시하여 그 법통의 계보를 더욱 엄하게 따지고 있었다. 때문에 전기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대개 스승과 제자사이의 관계를 빠뜨리는 예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도선이 당에 갔던 기록은 없고 더구나 당시 선문구산파 가운데 하나인 희양산파의 개조 도헌과 같이 당에 가지 않고도 새로운 선문을 개창했던 예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도선이 당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도선이 선을 전수받은 것은 혜철이었던 것과 같이 풍수지리설의 습득 또한 신비화되어 ``이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신라인``이 아니었을 까 추측된다.
그리고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전수 받은 곳도 구례에 인접한 남해안 지방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에는 일찍부터 풍수지리설이 유포되어 도선이 그것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 도선비문에는 이미 전술했듯이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전수받는 과정에서 이인이 도선에게 모래를 쌓아 산천의 형세를 보여주었다고 하며 그 지방을 사도촌이라 했다.
산천의 형세를 모래(砂)로 표시하는 방법은 당시 종이에 그리는 지도가 나타나기 이전에 원시적인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있어서도 용맥(龍脈) 가운데 가장 많이 생기가 취주(聚注)하는 곳을 ``혈``이라고 하며 이 혈 주위의 형세를 사(砂,沙 공용)라고 하는데 이 ``사``라는 명칭의 기원은 고대인들이 호적한 산세를 설시하거나 그 상지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때 모래(砂)로서 그 형세를 묘사하던 것으로 그 후 일정 지역의 산수형세를 호칭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사``라고 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은 곳을 사도촌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오늘날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고려 당시에는 그러한 마을이 실제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도선이 출생하여 성장하면서 불교를 공부했던 영암은 당과의 왕래가 비교적 원할했던 해안가라는 사실이다.
영암은 당시 대중교통의 중요한 관문으로 당에 유학한 선승들은 대개 이곳을 거쳐 귀국하고 있었으며 선문구산파 가운데 3파의 중심지가 영암에 있었던 점에서 비춰볼 때 선종과 풍수지리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전통적 불교인 화엄종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선종으로 개종한 도선에게 있어서는 풍수지리설이 또 다른 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초 중국의 선종과 풍수지리설은 일찍이 선종의 성립 초기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중국 선종의 창립자라고 할 수 있는 육조 혜능이 조계산에서 남종선문을 개창할 때에 진아선(陳亞仙)이라는 사람의 풍수지리설에 쫒아 보림사의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으며 혜능의 4세 법손이며 서당지장과 사형제간인 백장회해도 사마두타라는 풍수지리사와 소주처로써 위산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다른 한편 중국의 풍수지리설사에 있어서 특기할 사실은 도선과 거의 동시대인인 당의 양균송에 의해 집성된 강서지법(江西之法)이라고 하는 풍수지리설의 새로운 형법이 나타난 것이었다. 양균성이 주로 강서지방에서 그 술법을 유포했기 때문에 강서지법이라고 했다.
이 형법에서는 풍수지리설의 기본적 구성요소인 △산(장풍) △수(득수) △방위 가운데 산형이나 수세 등의 지세에 의하여 장지(葬地)나 도성·궁실 조영의 기지를 선정했다. 이의 대상으로는 음택으로서의 장지보다 양기로서의 도성·궁실 등을 더욱 중시했다. 따라서 이는 송대에 와서 왕급에 의해 집성된 옥택지법이 오행설을 응용하여 방위에 의한 장지나 도성·궁실의 기지를 선정하며 양기보다 음택의 선정을 주로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나 고려시대 풍수지리설의 대상으로 음택보다 양기가 중요시되었고 양기 가운데서도 개인의 주택보다는 사원이나 도성·궁실의 조영이 중요시 되었다. 이와함께 음택 선정이 풍수지리설의 주류가 되다시피 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였다.
그런데 이렇게 지형지세에 의해 양기의 선정을 중요시하는 강서지법이 집성된 강서지방은 당시 선종의 성립 사상에도 극히 중요한 곳이었다. 남종선의 2대파 가운데 하나인 마조도일 계통은 주로 이 강서지방에 유포되어 당말의 규봉종밀은 이 파를 강서종이라고 했던 것이다.
마조도일의 문하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백장회해 외에도 서당지장·마곡보철·남전보원·염관제안·장경회휘·창주신감 등이 있어서 신라하대에 성립된 선종구산파 가운데 8개산파의 개조들이 모두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강서지방에 있던 개원사의 서당지장 법사인 도의(가지산파), 홍척(실상산파), 혜철(동리산파)의 3개선파가 모두 도선과 같은 지방이 전라도 지방에서 개창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