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고토(後藤)씨 일행, 한국농촌 여행기
고토 찌카코( 後藤千香子·화가)

내용을 입력하세요.일본인 여류화가 고토(後藤)씨가 지난 5월, 학산면 광암마을 출신 현의송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공동대표의 인솔로 보성·장흥·영암을 방문한 소감을 기행문으로 작성해 보내왔다. 이 기행문은 일본현지 신문에도 소개돼 일본의 지식인들이 전남의 농촌지역 여행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고토씨는 영암에서 하룻밤 민박을 하면서 일제시대, 영암에 머물며 교류했던 과거 일본인 행적들의 느낀 소감도 적었다. 본지는 민간외교 차원에서 의미 있는 기행문으로 판단돼 한글로 번역된 기행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고 토 1957년 오이타 현 출생 런던대학 골든스미스칼리지 미술학부 졸업 음악을 테마로 작품활동 평화를 기원하는 설치미술 개인전(런던·동경 등) 30회

현의송 선생님과의 인연

삼껍질로 만든 종이를 아는가. 식물인 삼(麻)를 원료로 만든 종이이다.

오래 전, 종이를 조사해 보던 때, 어쩌다 들은 것이 삼 껍질로 만든 종이 즉 삼지(이하 삼지)를 들은 적이 있다. 호류지 헌물장(758년)에 사용됐다는 최고(最古)의 종이다.

“삼 껍질로 만든 종이를 뜨고 있는 사람을 압니다. 한국에는 한 명밖에 없습니다. 제가 안내 하겠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제안을 초면의 사람에게서 받았다. 현의송 선생님은 한국과 일본의 대학에서 농업을 가르치는 한국인이다. 유후인(湯布院)마을에서 개최된 그룹전 회장에서의 일이다. 나는 천(옷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현의송 선생님께서는 동료들과 전시회장 소유주 나카야겐타로(中谷健太郞·영화감독·85세)씨를 방문하던 참이다.

나카야씨는 “마침 잘 되었다. 현의송 선생님도 화가입니다”라고 소개했다. 현의송 선생님은 76세. 은퇴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서울 인사동에서도 큰 전람회를 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창한 일본어로 말하고, 나는 과거 다섯 번 한국에 여행한 것, 안동의 한지(일본에서는 일본 종이)를 쓰고 그림을 그린 것, 판소리(한국 농민의 춤)를 아주 좋아하는 것 등 정신없이 이야기했다. 그런 가운데 삼 껍질로 만든 종이의 이야기가 나왔다. 성질이 급한 나는  그 자리에서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5월 23일부터 3박4일 한국여행이 정해졌다.

한국에 떠나기 전의 주, 우연히 미야자키 거주의 종이에 정통한 지인에게 말했더니 “그래, 삼 껍질로 만든 종이를 사러 가니? 확실히 일본에는 삼 껍질로 만든 종이는 이제 없다. 손이 많이 들고 채산이 맞지 않으니까. 아아, 한국에는 삼지가 유지되고 있다니”라고 깜짝 놀랐다. 삼지를 아는 사람은 있는 것이다. 어떤 종이일까? 기대가 높아졌다.

5월 23일 하카타(博多)항을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한 쾌속선 비틀호는 예정보다 10분 늦게 11시 45분 부산항에 도착했다. 한국행의 멤버는 3명. 전 남편, 공통의 친구 M양이다. 바다도 조용했고 부드러운 항해. 부산 여객선 터미널부터 택시로 부산 서부버스터미널로. 예정대로 13시 5분 발, 목적지 보성행 버스를 탔다. 현 선생님부터 바로 전화가 걸린다.

“잘 탔습니까?”라고. 부랴부랴 터미널의 편의점(일본에 똑같이 생겼다)에서 김밥과 섞은 초밥을 사고, 차창 풍경을 바라보며, 이번은 약 4시간의 버스여행이다. 일본과 다른 것은 주먹밥 속이 한국식(마늘과 고추가루)인 것과 고층 건물이 많다는 것이다.

저녁 5시경 보성에 도착했다. 작은 역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현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삼 껍질로 만든 종이와의 만남

낮의 길이가 긴 계절, 2시간이나 버스 터미널에서 가다려 주신 현 선생님께서는 피로도 보이지 않고 “지금부터 삼 껍질로 종이를 만들고 있는 이찬식(李燦植) 씨의 집으로 갑시다”라고 말했다. 신록이 우거진 시골길을 차로 달려서 약 20분 이 씨의 집에 도착했다. 일본을 출발해서 9시간 후 당일 삼 껍질로 만든 종이를 만날 수 있다니, 감격적이다.

이 씨 댁은 고즈넉한 마을 입구에 있었다. 옛날 농가 같은 단층집 뒤에 대나무 숲도 있다. 아틀리에에 산더미처럼 쌓인 삼지, 이 씨는 삼을 직접 심고 수확한다. 종이를 뜨는 것만도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고개가 숙여진다.

“지금 이 종이가 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웃으면서 말씀하신다. 꿈에까지 본 삼 껍질로 만든 종이는 놀랄 만큼 담백하고 아름답다. 탱탱함이 느껴진다. 촉촉함 보다는 탄력 있는 감이 든다. 처음으로 직접 손으로 만져 본다. 두께는 2종류. 색은 황색과 흰색. 나는 예산이 허락하는 만큼 구입하고 포장해서 받았다. 일본에서 이제까지 구입해서 쓰는 와지(和紙)보다 사이즈가 크다. 2배 가까이 두껍다. 대량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가게에서 판매되지 않는다. 현 선생이 서울에서 개인전을 할 때 그 취재 기사를 읽은 이 씨가 “이 종이를 사용해 보세요”라면서 종이를 보낸 것부터 교류가 시작된 것이란다. 삼지에 유화를 그려도 가능한 종이라고 한다. 현 선생님은 캔버스 위에 삼지에 그림을 그려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종이를 뜨는 공방은 보성이 아니라 환경보호를 위해 전주에서 만들어 온다. 보성은 상수원 보호지역이고 한국 최고 차의 산지이며, 관광지이기 때문이란다. 또 사모님은 같은 삼지로 양복을 만들고 있었다. 한국식으로 바닥에 앉아 재봉틀은 쓰고 있다.

“이 쪽이 종이판매 보다 수입이 좋습니다”라고 한다. 멋진 초목염의 삼배 작품을 보여 주었다. 남편은 간절히 원했던 삼베옷을 구입했다. 나는 한민족의 옷을 구입했다. 뒤에는 옛날의 배 짜는 도구가 있다. 달콤한 매실차를 마시며 부부와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교류의 시간을 즐겼다.

그 뒤, 보성의 읍으로 나와(편의점도 없는 작은 마을) 잠을 잘 숙소에 도착했다. 옛날 한옥(양반의 집)이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하게 리뉴얼 된 숙소다.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돌방이 있고 간단한 부엌, 새하얀 반짝 반짝하는 화장실과 샤워장이 있다. 방 두 개를 빌렸다. 현 선생과 남편, 그리고 M이랑 내가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저녁 식사는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로컬식당이다. 현 선생님께 대접을 받게 되었다. 맛있는 뼈가 붙은 돼지고기에 많은 야채를 넣어 끓인 감자탕 냄비요리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모두들 즐거워했다. 일본을 출발해서 빵이나 김밥만 먹었던 우리는 “드디어 따뜻한 것을 먹을 수 있었다!”고 후후 하면서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계속 차를 운전, 통역 겸 가이드를 맡아 주신 현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삼 껍질로 만든 종이도 샀고, 이제 여행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내일부터는 여유 있게 관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의 식사 때의 매너, 아시나요? 술을 마실 때, 술잔에 첨작은 금물이다. 어른 앞에서 마실 때 옆으로 돌리고 마신다. 그릇은 들지 않는다. 국과 밥은 숟가락으로 먹는다. 그러나 배가 고플 때는 이런 매너도 금방 잊어버린다.

한국여행 이틀째, 장흥에서

장흥 호두박물관에서 호두를 고르고 있다.

나는 몰랐지만 현 선생님의 인맥은 전국을 망라하고 있다. 여행의 2일째 이후 마지막 밤까지 우리 세 사람은 현 선생님에게 신세를 지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유후인의 나카야씨가 소개한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또 나의 오랜 친구 동경의 대지를 지키는 모임(주)의 후지다 회장이 우연히도 현 선생님의 오랜 친구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따뜻한 마음이다. 우리 세 사람은 유명인사도 실업가도 아닌데 “친구의 친구는 나에게도 소중한 친구”라고 하듯이 나이, 성별에 관계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자주 얘기되는 반일 감정 등 어디를 둘러봐도 안 보인다.

그래서 여행의 2일째 8시 반에 숙소에서 나와 우리는 장흥군으로 향했다. 여행 일정은 모두 위임하고 있었다. 한국의 남서부는 우리 모두 처음의 토지, 삼 껍질로 만든 종이만 신세를 질 생각으로 있었지만 미술관, 명소, 고적, 관광 등 여행의 일정을 모두 현 선생님이 계획을 세워 주셨다. 지방에서는 영어도 일본어도 잘 통하지 않는다. 차가 없으면 못가는 장소도 많다. 그 후의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장흥에도 현 선생님의 친구인 정종순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토요시장의 국밥집에서 아침 밥. 고개와 맛이 응축된 소고기 국에 밥. 아침부터 이렇게 영양 있는 것을 먹어서 기운이 솟아 나온다. 시장이 아직 열지 않았으므로 정종순씨의 안내로 우드랜드라는 초록으로 둘러싸인 별장 휴양시설을 둘러본다. 해묵은 칩을 깐 산책로와 사우나, 카페, 식당이 산재한 기분 좋은 곳이다. 주말에는 항상 가득 찬다고 한다.

점심까지 시간이 있으니 근처에 있다는 호두박물관을 방문했다. 여기는 개인 미술관인데 드문 육각형의 호두가 전시되고 있다. 호도 2개를 한 손에 잡고 돌돌 소리를 내지 않고 돌리는 연습을 한다. 뇌에 매우 좋은 운동이 된다고 한다. 일본에서 온 손님 때문에 특별히 워크숍도 열어 주셨다. “꼭 닮은 호두 2개를 찾아봅시다.”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서 호두를 찾았다. 남편이 1등 상을 받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일본과 한국의 농촌현실

3박4일 한국 여행. 그것은 삼 껍질로 만든 종이를 구입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첫날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2일째부터 현 선생님에게 일정 모두를 맡기고 한국 여행을 즐기기로 했다. 교외를 안내하신 뒤 이번에는 같은 시장 안에 있는 강변의 레스토랑에서 새로운 명물 음식 ‘삼합’을 즐겼다. 장흥의 명물인 키조개(카이), 쇠고기, 버섯 등 3가지를 구워서 상추로 싸서 함께 먹는 것이다. 즙이 많은 조개의 추출물, 쫄깃한 쇠고기, 큼지막한 버섯이 이상하게 어울리고 맛있다.

사치스러운 요리인데 최근에는 서울에서 먹으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1층은 키조개와 쇠고기를 파는 가게, 2층은 그것을 요리하는 가게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재미있다.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야채에 싸서 먹으니까 부담 없이 많이 먹은 것도 불가사의다.

그 뒤 염색가인 박순진씨를 만나서 장터의 가게를 찾았다. 천연 염색만으로 염색한 옷이나 소품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눈을 감으면 거기에는 한약의 가게라고 불러도 납득할 만큼, 약초 냄새가 가게 밖까지 풍긴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입으면 몸에도 좋다는 것이다.

저녁 숙소에 도착하기 전, 현 선생님의 고향마을 생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낡지만 아름다운 건물)에도 안내해 주었다. 현 선생님이 쓴 시에 등장하는 개울이나 산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한국도 함께 겪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농촌인구의 노령화와 후계자 부족, 환경변화 그리고 중국에서 들어온 저렴한 인건비와 물품 등으로 여러 산업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고 한다. 또 지방에 크고 훌륭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지만, 별로 활용되지 못하고,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인상을 받았다.

현 선생님을 소개하신 유후인의 나카야씨의 말이 생각난다. “문화적인 동네라는 것은 큰 미술관이 덩그러니 있는 동네가 아니라, 작은 미술관이 여기저기 있는 동네가 되어야 한다”

영암에서 또 다른 추억

영암읍 회문리 조동현씨 부부와 일본인 여류화가 고토씨(맨위 오른쪽)와 일행들.

 

2일째 저녁, 장터의 농협에서 계절 야채와 과일을 듬뿍 사들고 숙박지인 영암읍내 조동현 씨(전직 교사·90세) 댁으로 향했다. 현 선생님의 지인 조동현씨의 집은 여관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리운 일본 이야기 좀 합시다. 남는 방이 있으니까.”라며 친구인 현 선생님 뿐만 아니라 우리 일행도 받아주셨다.

영암은 일본인들의 거주 흔적이 있던 곳이다. 조 씨는 90세의 연세에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피곤하지 않습니까? 바로 가까우니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을 안내하겠습니다”며 밝은 표정으로 저녁식사 전 마을산책에 안내를 해주셨다.

“여기가 당시 초등학교이며, 아내도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일본인이었는데, 위엄 있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젊고 열심이었습니다. 여기는 양조장인데, 정종을 만들었습니다…” 등등 “일본인에 대해 나쁜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세 개나 들었다. 하나는 종전무렵, 강제로 일본명찰을 붙이고 있던 친구들은 종전 소식을 들은 순간, 가슴에 붙이고 있던 명찰을 잡아떼고 발로 짓밟으며, 교실 안을 신발을 신은 채로 뛰어다녔다. 그때 일본인 교장 선생님의 벼락같은 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너희들이 감히 교실을 흙으로 더럽히다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라를 독립국가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일은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 더 큰 일이야. 너희들이 이처럼 무질서하게 한다면 너희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조 씨는 교장 선생님의 그 불호령에 너무 감동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날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것 또한 종전 때의 일인데 일본사람들이 한국을 떠난 후, 어떤 집에 들어섰을 때다. “모두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인이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고 모두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선 들어본 적이 없는 감동적인 얘기였다.

마지막 하나는, 전후 70년이나 지났을 때였다. 조 씨의 부인은 초등학교 동창생 몇 명이 “그때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의기투합 했다. 약간의 정보로 일본에 사는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다. 70년 만에 선생님을 만나러 간 제자들도 당시의 젊은 여선생님도 모두 고령이 되었다. 어렵사리 후쿠오카 공항에서 만난 선생님과 제자들도 모두가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안(童顔)의 조씨 부인 모습을 알아본 선생님이 뛰어가서 끌어안았다. 모두가 눈물로 포옹했다고 한다. 90을 넘은 선생님과 함께 새벽 3시까지 추억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았다.

부인의 정성어린 저녁을 먹으며 그런 시대이면서도 이 땅에 아름다운 씨앗을 뿌려주신 사람들, 받아주신 한국인들에 감사의 하룻밤이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잊혀지지 않는 많은 추억을 안고, 한국에서 마지막 숙박지 부산으로 향했다.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현 선생님이 급히 구입해주신 따뜻한 초밥을 가슴에 안고, 우리 모두는 서로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날씨도 아주 좋았다. 숙박은 자갈치 시장에 있는 싸구려 호텔. 주위에는 곱창구이 가게가 줄지어 있다. 저녁은 곱창구이로 당초 계획하고 있었는데, 아니 여기에도 현 선생님 친구의 배려로 싸구려 호텔에 고급 승용차로 마중 와서 우리는 초호화 저녁을 김진국 씨에게 대접받았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고 있는 사업가 김진국 씨는 영국에서도 산 적이 있다. 영어에 능통하다. 현 선생님의 친구로부터 “너에게 유후인의 친구를 만들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고 전화가 있었다고 한다. 항구가 보이는 식당 방에서 일본식 넙치의 초밥으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회와 새우에 전복, 파전, 불고기 등 각양각색의 요리가 즐비했다. 사모님과 젊은 시절 일본을 여행했을 때의 실패담 등을 들으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걸으면 10분 정도의 호텔에 다시 보냈다.

우리 일행은 출발 전까지 별도로 각자 행동을 하기로 했다. 나는 아침밥을 먹으러 찾아간 자갈치 시장의 사원 식당에서 마지막의 한정식을 즐겼다. 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시 55분 비틀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많은 한국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만나면서 대단히 충실한 여행이 되었다. 한국의 지도를 보니 이제는 전남의 바다를 떠올리며, 현 선생님 집의 개울을 생각하고 영암마을을 산책했던 조동현 씨 부부를 생각하게 되었다. 부산항의 새벽 냄새, 시장의 활기, 그것들 모두 규슈의 바다 하나 건너에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섬, 그림자를 더듬고 더듬어 노를 손으로 젓고 또 저어서,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시대의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서로의 나라가 오가는 일로 함께 살아온 생활과 문화가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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