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읍 동무리 출생 서울버스(주) 대표이사 회장 전 전국버스조합연합회 회장

필자의 나이가 벌써 80대 중반이 되어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 오랜 서울 생활을 하다 보니 그리운 고향 영암 생각이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생을 누리는 자 그 누가 원초적으로 자기뿌리의 묘판격인 고향이 없을까마는 오랜 객지생활을 하는 자는 항상 고향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일찍이 그 아름다운 호남의 명산 월출산 밑에 자리한 아담한 고장 영암골에서 고고의성을 울렸고 철없는 유년시절과 꿈 많던 소년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중학시절부터는 객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주말과 여름, 겨울방학 동안 나는 늘 고향의 훈훈한 흙냄새와 아늑한 분위기가 그리워 자주 찾아 가곤하였다.

내 고향 영암은 우선 위도 상 남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시냇물에 살얼음이 살짝 얼고 마루에 놓아둔 걸레가 밤사이에 얼어서 굳어져 있으면 매우 추운 날씨로 친다. 한편 겨울이면 군서면 해창 쪽에서 비교적 찬바람이 많이 부는 편이여서 체감온도가 다소 춥기는 하였지만, 한강물이 꽁꽁 얼어버리는 서울의 추위에 비하면 따뜻하여 견디기가 쉬운 겨울임에 틀림없었다.

아무리 추운 한 겨울철이라도 양지바른 곳에서는 파릇파릇한 풀이 겨우내 살아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으며 보잘 것 없는 잡초일망정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데 대하여 깊이 감복하여 나의 인생 항로개척에 적지 않은 교훈으로 삼고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이 겨울이 오면 또 봄이 멀지 않은 법이여서 영암의 봄은 그 따스함과 만물이 소생하는 신선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무렵부터 영암인의 기상의 상징인 월출산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며 푸른 단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신록이 산야를 덮는 초여름의 계절이 돌아오면 우리에게 미각을 돋우는 푸른 과일이 선을 보인다.

한여름의 영암은 어느 시골과도 다를 바 없는 정취를 가져다주지만, 참외 수박으로 포만감 가득 채워진 배를 안고 스쳐가는 산들바람을 벗 삼아 한숨 자는 원두막의 낮잠하며, 숲속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 등은 요즘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 숲에서 진땀 흘리며 바라보는 도시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늑한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정경이요 또한 납량제였다.

여기에 냄새나는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은근히 코에 스며드는 소똥냄새 또한 나 같은 시골출신에겐 더할 수 없는 향수를 가져다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한여름이 지나고 나면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 가을이 어찌 한국만의 것이고 영암만의 것 일까마는 내가 회상하는 영암의 가을은 1년 중 참으로 가장 잊기 어려운 계절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높은 가을하늘, 초가지붕위에 널려있는 빨간 고추들, 흙 담장에 걸쳐있는 박 넝쿨, 날이 갈수록 빨갛게 익어가는 감들, 그리고 추수기에 접어들면 멀리서 들려오는 타작소리며 논길을 걸어가는 소의 풍경소리, 밤이면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돌 틈에서 들려오는 가지각색의 벌레들의 교향곡들...

그 누군가 봄은 여자의 계절이며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다던가. 나는 고향의 사계절을 어느 하나 좋아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내 고향의 가을은 어느 곳의 그것과도 바꿀 수 없는 정서와 멋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운 고향의 정은 똑같지만 사업관계로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나로서는 고향에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1년에 한번정도. 그때는 으례 집사람과 아들 며느리, 손자들을 데리고 찾곤 한다.

사람은 어느 동물 못지않게 본능적으로 귀소성이 강하다고 한다. 이천년 동안 주변의 다른 민족의 갖은 박해 속에서도 고향의 정을 버리지 않고 끈질긴 집념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태인들의 끈기는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주고 있고 유명한 세계적인 희극배우 ‘채플린’이 늘그막에 고향땅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랫동안 살아온 미국을 떠나 고향 가까운 스위스에서 생을 마쳤던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내 고향 영암은 예로부터 왕인박사와 도선국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각계각층에 훌륭한 인물을 수없이 배출하여 인물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영암에서 태어난 것을 나는 퍽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에 막혀 그 흔적조차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75년 전 초등학교시절 친구들과 덕진다리 바로 밑까지 놀러갔을 때 돛을 단 풍선에 직접 올라가보았으며, 6.25동란 중에는 망호리(영암읍) 2구인 배날리에서 풍선을 타고 목포까지 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암읍 춘양리 2구 장포(일명 장굴동)는 당나라와 일본을 직접 왕래한 포구였으며 영암읍 앞들이 전부 바다였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들은 기억이 난다. 그것으로 보아 군서면 상대포에서 왕인박사가 직접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개인적으로 내 고향은 한반도의 남단 영암이어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녀 올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만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교포들에게는 한국이야말로 조국이요 바로 고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조국은 그들에게 더할 수 없는 향수와 더불어 이 지상에서 생을 누리는데 보람과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요소가 되리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믿는다. 물론 서구식 생활양식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위생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오늘날과 같이 콘크리트 숲속과 규격화된 공간에서 훈훈한 고향의 맛을 보거나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일생을 마치는 것을 커다란 행복으로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 말의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 같아 나는 비록 일신상의 형편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고향을 마냥 그리면서 살고는 있지만 나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인 우리 고향 영암이 개발의 여파와 상관없이 마치 인자하신 어머님의 품안처럼 그 정겨운 옛 모습을 언제까지나 지녀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영암인들은 영암의 긍지와 자부심을 살려 우리고향 영암발전에 강력한 힘을 모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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