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면 영보 生 전 서광초등학교 교장 한국전쟁유족회 영암부회

60년대 말 한해(旱害)로 인해 2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했다.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하늘을 원망하면서 기우제를 지냈으나 땡볕만이 대지를 뜨겁게 달구었다. 냇가 도랑까지 모두 파헤쳐 땅속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이라도 논으로 품어 올려 모를 심었으나 벼락 맞은 나무처럼 검붉게 타 들어만 갔다.

훈훈했던 농촌의 인심마저 숨이 막히도록 각박해졌다. 우리 집 형편도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고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둔 나의 가슴을 무거운 돌로 짓누르는 것처럼 옥죄어 왔다. 모래알이라도 녹일 식욕에 배불리 먹을 형편이 못되니 늘 허기졌다. 그래서 스스로 돈을 벌어 허기진 배를 채워보고, 용돈이라도 벌어 볼 겸, 가정 형편이 나와 비슷한 친구와 함께 무작정 낯선 고장으로 떠났다.

영암에서 광주행 버스를 타고 영산포를 벗어나면서부터 고학생 행세를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좁은 버스 안을 비집고 끼어 다니며 우리의 웅변을 대변할 엽서 크기의 쪽지와 학용품을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그들은 우리를 외면해 버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가슴이 떨려 목구멍에서 소리가 들락날락, 나누어 준 그 쪽지를 겨우 읽을 정도였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6.25사변 때 저희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저희는 한 살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제 어머니가 후두암에 걸려 수술하시고 병원에서 치료 중이십니다. 친구 어머니도 병이 나서 농사일을 못하십니다. 몇 마지기 되지도 않는 다랑논이 전부인 우리 가정은 이태나 쌀 한 톨 수확하지 못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좋습니다. 불쌍한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눈물이 곧 쏟아질 것 같았지만 온힘을 다하여 꾹 참았다. 돌렸던 쪽지를 거두면서 학용품 값을 지불해 주는지 손님들을 살폈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쪽지와 학용품만 돌려주었다. 귀찮다는 눈치들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고개를 들고 다시 사람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몇 차례의 버스에 오르내리며 시도해 보아도 성과가 없으니 친구도 괜히 시작했다고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한 아주머니가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연필 값을 치렀다. 고마워서 그 아주머니 앞에서 절을 몇 차례나 했다. 용기가 생겼다. ‘주저할 게 없다.’ 몇 번의 버스를 더 오르면서 뻔뻔스러워졌다. 그러나 서툴기 그지없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여러 번 버스를 바꿔 탄 사이에 진짜 고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텃세를 부리며 싸움을 걸어올 기세였다.

“여기는 내 나와바리다. 이 촌놈들아 어디서 까불고 있어!” 

이 바닥에서 꾀나 한 놈인가 위세가 당당했다. 나를 금방이라도 때릴 것 같이 눈을 부라렸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너희들은 원구(援救)도 못 치냐?”
“그래 가지고 무슨 돈을 벌겠다고….”

큰 눈으로 쳐다보는 당당한 그 모습에 기가 죽고 주눅이 들었다.

“손님들 앞에서 불쌍하게 애걸해야지.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고개는 약간 숙인 듯 다리를 절뚝거려야 해.”

그의 말대로 해 보려했으나 원구까지의 실력은 아직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고학생이라고 공짜로 버스를 태워준 기사님들이 고마웠다.

가는 곳마다 수입이 조금씩 늘어 재미가 짭짤해져 갔다.

저녁 때가 되어 장성 어느 시골 들판 원두막을 찾았다. 그 곳은 가족이 있는 포근한 우리 집 같았다. 여기저기 달덩이 같은 수박이 잎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달빛에 반짝거렸다. 수박의 붉은 속살이 꿀처럼 달 것 같아 군침이 돋았다.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주인은 수박을 공짜로 줄까? 오늘 번 돈으로 그냥 사 먹을까?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주인 아저씨가 수박 한 덩이를 쪼개어 먹으라고 권하며 여기에 온 사정을 물었다.

친 삼촌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 왔으나 워낙 배가 고파 고맙다는 말도 없이 허겁지겁 시원하고 사근사근한 수박만 먹어댔다. 배가 불러 만족하니 원두막에서 금세 곤히 잠이 들고 말았다. 꿀맛 같은 단잠에 쌓였던 피곤이 사라진 듯 개운했다. 아침인 줄 알고 거적문을 젖히니 해가 중천이었다.

고마운 아저씨는 아침 일을 갔는지 그 곳에 없었다. 마음속으로 수 십 번 감사하다고 했지만 수박으로 끼니를 때운 탓인지 속이 허심하고 시장기가 들었다. 다리를 휘청거리면서 동네로 내려갔다. 싸리나무로 앙증맞게 만든 어느 집 사립을 젖히니 부엌 앞문에 보리쌀 삶은 밥 바구니가 우리를 반겼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군침을 삼키며 인기척을 했다.

“계십니까?”

머리를 단정히 묵은 우리 또래의 곱상한 아가씨가 나오면서 경계하는 눈치였다.

“지나가는 고학생인데 밥 좀 주세요.”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두려움을 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 남은 밥이 있는 갑네.’ 구세주를 만난 듯이 반가웠다. 정갈한 반찬 몇 가지와 보리밥 한 그릇을 고맙다는 말도 없이 먹어치웠다. 밥이 입에 들어와 혀에 닿는 순간 달콤한 그 맛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진수성찬이 어디 있을까? 기막히게 맛있었다. 두서너 번의 수저질에 빈 밥그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염치는 있었는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원구치는 것처럼 인사를 여러 번 했다.
여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장사한 그 돈으로 할아버지가 드실 막걸리와 안주를 사니 발걸음이 가벼워 나를 것만 같았다. 공무원 시험 문제집도 몇 권을 가슴에 품으니 합격이라도 된 듯이 기뻤다.
그때의 원구가 오늘날 나를 있게 한 따스한 소리로 다가와 속삭여 웃음 짓게 한다.

*(주)
1) 나와바리 : 영향력이나 세력이 미치는 공간이나 영역을 속되게 이르는 말
원구(援救) : 웅변조로 여러 사람 앞에서 외쳐대는 행위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