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복(군서면 도갑리 ·월라향토문화연구회장)

둘째, 고려사 왕건의 훈요십조가 문헌에 의하면 고려사 태조편이 편찬되었지만 현종시대 거란군 40만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왕건이 죽은지 80년이 지나서야 최재안 이라는 사람이 최항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문서라고 하여 실록에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고려사 및 고려사절요편)
셋째, 왕건이 호남사람들을 배척 할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왕건이 다스리는 기간에는 오히려 호남인들이 크게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만 보아도 위작임을 알 수 있다. 왕건이 평생동안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와, 살아서는 상주국이요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도 영암출신이요, 왕건의 2세 혜종의 어머니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 오씨부인도 나주에서 만난 사람이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살았던 동산원 부인과 문성왕후도 승주태생의 순천박씨로 견훤의 외손녀 들이었다.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왕건으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았고 왕건을 대신해 죽었다는 신숭겸은 곡성 사람이다.
넷째, 훈요십조를 받아쓰라는 박술희는 당시 백제땅의 당진 사람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사람인 그를 불러 쓰게 했을까.
다섯째, 훈요십조 제8조가 날조되었다는 의문점은 고려 현종 때 훈요십조가 나왔는데 최항도 이미 죽은 뒤에 최항의 사가(私家)에서 나왔다는 것, 훈요십조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미 신라의 구신들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다.
여섯째, 이미 왕실에서는 전해 내려왔을 훈요십조가 현종이 거란의 친입시 왜 미워하는 호남으로 피난을 왔을까(전주에서 7일간 머물렀고, 나주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음)하는 점이다.
이외에도 10여 가지가 넘는 의문점이 더 있다. 호남인들에게 가장 억울한 것은 박정희 시대 때부터 지역감정이 그어졌다고 하는 것과는 달리 더 먼저 이미 호남 사람들은 서울에서 신혼부부나 학생들이 전셋집이나 하숙방을 얻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것인가. 걸핏하면 화합과 상생을 부르짖는 정치인들 위작(僞作)인 훈요십조를 바로 말하기는 영남의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입을 열어야 할 때다. 천년을 두고도 고쳐지지 않는 이 지역차별 조항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