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제일의 법률가, 헌법기초에 주도적 역할→ 이승만 박사, 내각책임제 불만 제기→ 헌법기초위원회 재논의 낭산이 나서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
낭산은 1948년 5월 10일에 거행된 역사상 최초의 민주선거인 5·10총선거 때 전라남도 영암에서 무투표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다. 마침내 5월 30일 국회가 소집되었고 낭산은 국회에 진출하여 제헌국회의원 겸 헌법기초의원이 되었다.

헌법기초의원은 낭산을 비롯하여 서상일, 허정, 백관수, 조봉암, 홍익표, 지청천 등 30명이었는데, 특히 낭산은 한국 제일의 법률가였으므로 헌법기초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또 헌법전문위원으로는 유진오, 한근조, 권승열, 차윤홍, 노진설, 임문환, 윤길중 등 10명이 선임되어 법조계와 학계의 의견을 반영하기로 하였다.

1948년 6월 23일, 헌법초안이 완성되어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때 낭산은 1930년 재판받던 시절,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 당시 모리우라 검사가 재판정에서 낭산을 논고할 때 “김준연씨는 과거 러시아에도 간 일이 있는 자로서 조선공산당 당수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구라파(유럽)에 유학갈 때 먼 훗날 조선헌법 제1조는 자신이 직접 쓰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는 것을 중요한 죄목으로 삼았던 것을 회상하고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왜냐하면 낭산 그 자신이 직접 대한민국의 헌법을 작성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임시정부 내무총장이었던 신익희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일제시대 고등문관시험합격자 80명을 모아 헌법과 정부조직법, 행정, 경제정책 등 건국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신익희 총장의 브레인 역할로 모여든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행정학회’였다(후에 정경연구회라 하였다). 행정학회는 최하영, 차윤홍, 이태용, 장경근, 강명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히 최하영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도 우등으로 합격한 천재로서 고관을 역임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당시 우당 허비 선생, 최하영 선생, 장철수는 3대 천재로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행정학회에서는 최하영이 주동적이었다. 최하영은 바둑실력도 뛰어나서 한국기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최하영과 정경연구회
최하영은 독일의 바이마르헌법과 중국의 오권헌법 등을 참고하여 헌법초안을 작성했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 의회는 양원제로 삼았고 경제조항도 신설하였다. 이때 유진오가 제시한 사안 역시 권력구조나 의회제도, 경제조항 등 최하영이 작성한 정경연구회안과 대동소이했다. 다만 새헌법에는 인권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권력구조 등에 앞서 이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과 다른 유진오의 구상이었다. 학계에서 제일의 헌법학자로 알려졌던 유진오는 자신이 작성한 사안보다 최하영이 작성한 헌법초안이 훨씬 더 우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유진오는 최하영의 헌법초안을 채택하기로 하고, 자신의 인권조항만을 반영하기로 하였다.

국회부의장 신익희는 최하영과 유진오에게 헌법초안을 작성하도록 요청했는데, 유진오는 김성수에게도 이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그때 김성수는 고려대학교 교주이고, 한국민주당 당수였으므로 낭산을 비롯한 한민당 중진들도 헌법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내각책임제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최하영이 작성한 정경연구회안을 토대로 유진오의 사안이 반영된 초안을 심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6월 15일 갑자기 이승만 박사가 헌법심의를 하고 있는 중앙청 제2회의실에 나타났다. 이 박사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을 보면 공산당들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키고, 남북협상파들이 총선거를 거부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국 초기의 혼란시기에 국민들은 강력하고도 신속한 방책을 요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부가 강력하려면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를 만들어 국사를 논의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권고하였다.

이어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유진오를 불러 내각책임제에 대한 불만을 말했으나, 헌법기초위원회에 이미 상정된 이상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국회에서는 헌법을 빨리 기초하라고 재촉하였다. 헌법기초위원장인 서상일은 6월 21일 국회에 출두하여 “오늘 제출하려고 했으나 준비가 덜 되었으니, 재명일에는 기필코 제출하겠다.”고 말하였다.

     #이 박사의 폭탄선언
이날 오후 이승만 박사가 헌법기초위원회에 재차 찾아와 “지금 마련되어 있는 헌법초안과 같이 대통령의 권한이 약하면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하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은 차라리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물러나 국민운동이나 하겠습니다.” 하고는 의석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당시 민족 진영에서는 이승만 박사가 유일한 대통령 후보자였으므로 이 말은 정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서재필 박사는 이승만 박사보다 인격이나 투쟁경력이 훨씬 뛰어났지만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지 않았다.

또 영친왕은 한국에 없었고 김구, 김규식 선생은 남북협상에 실패하고 총선거에 불참했다. 송진우, 여운형은 이미 피격되어 타계한 뒤였다. 따라서 이승만 박사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대통령후보로 이승만 박사가 유일하게 꼽히고 있었는데, 그가 대통령 후보를 거절하면 정부수립이 늦어질 것이 뻔했고, 이는 또 다른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게 되리라 예상되었다.

낭산을 비롯한 헌법기초위원들은 기초위원회의를 중지하고 다시 소집되었다. 한국민주당 중진들은 그날 밤 한민당위원장 김성수의 집에 모여 헌법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자리에서는 헌법초안을 재명일에 내놓기로 했으나, 100여 조나 되는 헌법초안에 손을 댈 수 없어 그대로 내놓아서 본회의에서 토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일단 본회의에 내놓으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뜯어고칠 수는 없게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렇게 되면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앉힐 수 없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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