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차 진한향에 풍류를 노래한다


망월사 달 밝은 밤, 찻물 끓는 사이에
▲ 매화꽃이 활짝 핀 망월사 전경. 둘째 아이를 잉태하여 10년 전에 심은 청매 한 그루가 이렇게 자랐다.
어제 밤새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 아침은 제법 쌀쌀합니다. 하늘이 잔뜩 흐리고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습니다. 이런 날 자칫 집안에만 있다 보면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산책을 나가기에는 바깥 날씨가 너무 을씨년스럽습니다. 이럴 때는 절친한 벗을 불러내어 술 한 잔,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면 좋을 텐데 다들 바쁘게만 살아가는 터라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시 TV 뉴스를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이 몹시 번잡하고 소란스럽습니다.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소식부터 4대강 사업, 남북 경협문제, 반인륜적 범죄에 이르기까지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오지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이 나라의 백성인 이상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요. 계속 보고 있자니 머리가 어지럽고 무기력증이 생기려 하는 것 같아 방에서 나왔습니다. 책이나 볼 요량으로 서재로 가니 벌써 아내가 찻물을 끓여놓았습니다.

“뭐 볼 거 있다고 뉴스를 보고 그렇게 속상해해요? 그냥 차나 한 잔 마시면서 마음 푸세요.” “당신 말이 맞소. 마당에 나가서 매화꽃을 따다가 매화차나 마십시다.” 아내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봄에 마시는 풍류차(風流茶) - 매화차
▲ 봄에 마시는 풍류차의 대명사-매화차
사실 예부터 차를 즐겨한 선비들은 늘 홀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다보면 흐트러지고 어지러워진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차분히 가라앉곤 합니다. 잠시라도 세상일을 잊고 평정심을 되찾는 것이겠지요. 장자(壯子)는 이런 상태를 좌망(坐忘)이라고 했습니다.

좌망(坐忘)은 단정히 앉아 일체의 물아(物我), 시비(是非), 차별(差別)을 잊고, 또한 인의(仁義)와 예악(禮樂)마저도 잊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을 수양하는 참선이나 명상에서 추구하는 도의 경지인데, 홀로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도 이런 좌망의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이름난 다인(茶人) 매월당 김시습은 혼자서 차를 마시며 체험한 좌망의 상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마음이 물처럼 맑으니
자유자재하여 막히고 걸림이 없네
바로 이것은 사물과 나를 잊는 경지이니
혼자서 잔에 차를 따라 마시니 좋구나


우리와 같은 속인이 감히 매월당이 체험한 망물아(忘物我)의 경지를 넘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차를 마시다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마당에 나가서 반쯤 벌어진 매화꽃 봉오리를 몇 개 따다가 흰 접시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하얀 접시 위의 붉은 홍매 몇 송이와 푸르스름한 청매 몇 송이가 고절(孤節)한 향기를 내뿜으며 단아하게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향기는 찻잔 속의 따뜻한 물에 배어들고 마침내 한 모금 머금은 입안을 거쳐 온몸 속으로 퍼져나갑니다.

봄에 마시는 차 중에 제일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매화차가 최고입니다. 이 매화차를 사람들은 ‘봄의 풍류차’(風流茶)라고 부르며 앞 다투어 매화차를 만들어 마십니다. 매화차를 만들어 마시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반쯤 벌어진 매화 몇 송이를 조심스럽게 따다가 예열된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조금 기다렸다가 찻잔에 따라 마시면 됩니다. 또는 녹차를 우려 따른 찻잔에 매화를 한 송이씩 띄워 마셔도 좋습니다. 녹차 향과 매화 향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미묘한 이중주의 향기는 세상의 복잡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해줍니다.

대도시에서 사시는 분들도 인근 공원이나 산에 피어있는 매화 꽃봉오리를 몇 송이 따다가 모처럼 한가하게 매화차를 우려 마셔보면 어떨까요? 너무 바쁘게만 살면서 지나치게 세상일에 몰두하다보면 자칫 건강을 해칠 수가 있습니다. 한가로운 시간은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법입니다. 창밖으로 꽃샘추위의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긴 하지만 오늘 저녁 한 시간만이라도 매화차를 마시면서 한 번 좌망(坐忘)의 경지를 체험해 보세요. 저녁 TV는 꺼놓고요.


신북 호산의 망월사
매화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매화를 참 좋아합니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영암 신북 호산에 있는 망월사 앞뜰에 청매화 한 그루를 심고 법당에 헌시(獻詩)를 했습니다.

- 망월사 달 밝은 밤
찻물 끓는 사이에
매화꽃이 벌어,
그 향기 온 세상 뒤덮네 -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 훌륭하게 자라서 매화 향기처럼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 염원이 빛을 발해서인지 지금까지 해맑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 망월사 석간수. 망월사가 있는 산 이름이 호산(虎山)이다. 풍수상 호랑이 형국이기 때문이다.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샘은 호랑이 젖에 해당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다고 한다.
지난 월요일에 그 망월사를 다녀왔습니다. 망월사는 월출산에서 떠오르는 달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사찰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전망이 좋고 운치가 있습니다. 이 망월사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깨끗한 석간수(石間水)가 흐릅니다. 물맛이 정말 좋습니다. 무색무취하고 감칠맛이 돕니다. 가끔 이 물을 떠다가 찻물로 쓰는데, 이 물로 차를 다리면 차의 색과 향도 뛰어납니다. 이 석간수를 물통에다 가득 채우고 매화나무에게 갔습니다. 이 매화나무를 심어놓은 지가 10년째인데 가지가 무성하니 잘 자랐습니다. 매화 꽃봉오리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맑고 그윽한 향기가 온 뜰에 가득합니다.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만큼 큰일은 없다.

세상에 나무를 심어 가꾸는 것만큼 커다란 공덕(功德)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성하게 자란 매화나무를 찬찬이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 말의 뜻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집안에 아이가 생기면 기념으로 뜰에 나무를 심고, 그 나무를 ‘아가나무’라고 불렀다 합니다. 주로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나 잣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딸이 시집을 갈 때, 그 오동나무를 베어 가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사라져버린 풍속인데 참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풍습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앞으로 아이를 낳을 분들이 계시다면 꼭 ‘아가나무’를 심기를 권합니다. 꼭 소나무나 오동나무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앵두나무나 매화나무도 좋고 느티나무나 이팝나무도 좋을 것입니다. 도시의 사는 집에 나무 심을 공간이 없다면, 고향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 마당에 심어도 좋고, 아니면 사찰이나 공원에다 심어도 좋을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나무를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이십 년 후에 망월사 뜰 안에 가득 가지를 드리울 매화나무를 상상하면서 오솔길을 내려왔습니다.
글/사진 =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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