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영산강물과 윤기나는 갯벌 ‘아련한 추억속으로’
봄 비
봄이 오는 문턱에서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황토 빛 마당 위로, 고샅 앞 시누대 이파리 위로,
울타리 옆 소나무 가지 위로 하염없이 봄비가 내린다.
온갖 부조리와 스캔들로 얼룩져 삐걱거리는 이 세상 위로,
희망을 상실하여 미움만 가득 찬 사람들의 왜소한 어깨위로,
그냥 무심하게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메말라있던 대지를 적시고 겨우내 잠들어있던 초목들을 깨운다.
우수에 내리는 비는 산 빛을 맑게 하고 들녘을 싱그럽게 한다.
창문 밖으로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보리밭과 야산 둔덕의 풀빛이
비를 맞아서 그런지 좀 더 푸르러 보인다.
시인 이수복은 그것을 ‘서러운 풀빛’이라고 불렀다.
풀빛이 서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필경 마음이 서러운 것이리라.
그렇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들뜨고 소란스러운 날
-역설적으로 우리는 서러운 것이다.
빗방울이 약해진 틈을 타 마당에 나갔다.
산수유나무는 벌써 노란 꽃봉오리를 절반쯤 피우고 있었고
동백과 청매실 나무도 꽃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옮겨 심은 개나리, 당국화, 심산해당화, 명자꽃, 백목련, 진달래, 영산홍들도 물이 올라 있었다.
오늘 오는 봄비로 이들은 더욱 더 바빠질 것이다.
뿌리로 흡수한 생명수를 물관을 통해 뽑아 올려,
그 동안 잠들어 있던 메마른 가지의 눈을 깨워 세상을 보게 할 것이다.
위로 흐르는 물! 생명의 역동성!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다.
이 생명의 역동성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봄은 소란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나무 가지에서 움이 트고
꽃나무에서 꽃봉오리가 속살을 드러낸다.
새들만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 것이 아니다.
꽃들도 마찬가지이다.
무릇 모든 꽃들 역시 겨우내 봄을 기다리다 지쳐 피멍든 마음들이
각기 제 방식대로 자기 색을 수렴하여 간직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날이 오면 자신들의 마음을 절절히 토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이렇게 외치고 싶다.
모든 꽃들도 제 이름을 부르며 꽃망울을 터뜨린다!
봄비가 내리고 바야흐로 봄이 왔지만
봄이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
봄비에 젖은 풀을 보고 서러워하는 사람들.
현대에 사는 사람들은 진정 외로운가 보다.
진정 서러운가 보다.
우리는 언제 봄비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언제 서러운 풀빛이 싱그러운 풀빛이 될 수 있을까?
지금도 봄비는 내리고 있다.
방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봄비를 맞아 온갖 초목들은 기지개를 켜고 감았던 눈을 뜨고 있다.
사람들이 외로워하든 서러워하든 아랑곳없이.
단지 깨어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흙 냄새나는 오솔길을 걸을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
봄비가 내리고 꽃은 피는 것이리라.


신기동은 양장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일제 강점기 말에 ‘학파농장’이라고 불린 간척지가 생긴 후에 생성된 마을이다. 신기동(新起洞)이라는 이름에 나타난 것처럼 농토를 찾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새롭게 형성되었다. 주민들 대부분 수도작에 종사하는데, 기존의 간척지에다 영산강 하구둑 공사로 광활한 들녘이 보태져 경작지가 배로 늘었다.
구성(九成)의 추억

희한하게도 봉우리 정상마다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아주 높은 봉우리는 아니었지만 정상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아찔한 높이였다. 그래서 늘 꼭대기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곤 했었다. 이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시종과 도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보이고 월출산 천황봉도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구성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볼 때, 흰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가 왜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졌었는지...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아홉 개의 황토 봉우리라도 그대로 놔 두었었더라면 아마도 이 구성(九城)은 전국에서도 희귀한 천연기념물이 되었을 것이다.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