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둑길 수놓은 갈대숲 ‘아름다운 몸짓’으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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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리 |
김재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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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
쪽두리 바위를 이고 |

양을 풀어 키우기에 좋았던 ‘염소 마당’
양장마을은 염장마을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첫 글자인 ‘염’자를 소금 염(鹽)자로 잘못 이해하여 소금을 생산했던 마을이라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염장은 ‘염소 마당’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양장(羊場)이 된 것이지. 마치 ‘배바우’가 주암(舟岩)이 되고, ‘마당바우’가 장암(場岩)이 된 것처럼 말이여. 보다시피, 우리 양장마을은 반도처럼 생겼제. 이 너른 언덕이 염소(양)를 풀어서 키우기에 좋은 마당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지. 그리고 이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 아닌가? 삼호처럼 바닷가 마을에서 염전을 조성하여 소금을 만드는 것이지 어찌 강에서 소금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에는 ‘솟대등’ ‘기와집개’ ‘홍산등’ 등으로 불리는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솟대와 기와집, 그리고 홍살문이 있는 지역이었으리라. 약 400년 전에 장씨, 류씨, 김씨, 양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여 마을이 커지면서 주변 소나무 동산과 논밭이 점점 택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지남들녘을 만들어낸 진남제가 시작되는 곳을 ‘언머리’라고 부른다. 이 언머리에서 동호리 수패에 이르는 둑길을 ‘언둑’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이 언머리는 군서면에서 생산되는 농산품과 수공예품을 실어 나르는 선창이었다. 모정리 쌀과 구림마을 대나무도 이곳 언머리 선창에서 배에 실렸다고 한다. 군서면에서 해창과 언머리에 창고가 있는 포구였던 셈이다.
물이 귀했던 동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양장마을이 ‘소 성국(형국)’이라고 주장한다. 마을 뒤편의 커다란 곰솔나무가 있는 곳을 ‘와우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소나무 곁에 있는 정자 이름도 와우정(臥牛亭)이다.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를 ‘소뿔에 매단 꽃’으로 비유한다. 옛날 농가에서는 따뜻한 봄날, 처음 소를 끌고 들녘으로 쟁기질을 하러 가는 날에는 소의 머리에 꽃을 달아 주는 풍습이 있었다. 꽃피는 춘삼월에 일하러 가는 소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는 농부의 세심한 배려였다.

양장마을은 물이 귀한 마을이었다. ‘소 구시’라고 불리는 우물이 마을에 유일한 샘이었다. 100호가 넘는 큰 마을에 우물이 하나 밖에 없었기에 이 샘은 당연히 신성시 되었다. 일제 시대 전 까지만 해도 큰 당산제를 모시지는 않았지만, 대보름날 농악을 하면서 샘굿을 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이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소와 양처럼 순박하고 협동심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평하고 있었다. 박영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양장마을은 물이 귀한 동네이지만, 불이 나서 집이 무너진 경우가 한 번도 없었어. 이웃집에 불이 날 경우에는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지. 부녀자들까지 나서서 집에 길러놓은 물을 가져 와서 불을 껐으니까. 물이 없을 경우에는 소변을 담아 놓은 항아리에서 오줌 물까지 퍼다 불을 껐었지.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 하나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이여.”
이 순박하고 인심 좋은 마을에는 영암고을 어느 마을에도 없는 보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와우등’이라고 불리는 곰솔 동산이다.<계속>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