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둑길 수놓은 갈대숲 ‘아름다운 몸짓’으로 노래


양장리

 

        김재흔

 

올해도
내 고향 양장에는
가을이야기가 풍성한
월출산의 똘감이 익고 있겠지

동녘케 넓은 들에
기러기 떼가 날아들면
남월래에 핀 들국화도
시집가는 큰 누나를 향해
고개로 끄덕이며 작별했겠지

 

쪽두리 바위를 이고
은적산에 떨어지는 해가
서호강의 물구비 구비마다
곱게 불이 든 내일의 희망을
또다시 봉황이 와서 울어대겠지

올해도 내 고향 양장에는
원둑길에 수놓은 갈대들이
아름다운 몸짓으로 노래하고 있겠지

 

모정리 솔짓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언덕길을 10분 정도 걸어가면 양장마을이 나온다. 이 언덕길은 서구림 신흥동에서 시작하여 모정리를 지나 양장과 신기동까지 이어지는데 거리상으로 월출산과 은적산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 구릉에서는 병풍처럼 펼쳐진 월출산과 은적산의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다. 동쪽으로는 지남들녘이, 서쪽으로는 몽해들녘이 수반처럼 두 명산을 떠받치고 있다. 영암에서는 이렇게 멋진 조망권을 갖고 있는 언덕길이 드물다. 여운재 길이 제법 운치가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는 오직 서편 풍광과 일몰만을 볼 수 있을 뿐인데 반하여 이곳 양장길에서는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양을 풀어 키우기에 좋았던 ‘염소 마당’
양장마을은 염장마을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첫 글자인 ‘염’자를 소금 염(鹽)자로 잘못 이해하여 소금을 생산했던 마을이라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와우등에서 내려다본 양장마을 전경.
마을 주민 박영대씨(71)는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염장에서의 염자는 원래 염소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었다.

따라서 염장은 ‘염소 마당’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양장(羊場)이 된 것이지. 마치 ‘배바우’가 주암(舟岩)이 되고, ‘마당바우’가 장암(場岩)이 된 것처럼 말이여. 보다시피, 우리 양장마을은 반도처럼 생겼제. 이 너른 언덕이 염소(양)를 풀어서 키우기에 좋은 마당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지. 그리고 이곳은 바닷가가 아니라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 아닌가? 삼호처럼 바닷가 마을에서 염전을 조성하여 소금을 만드는 것이지 어찌 강에서 소금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이전에는 ‘솟대등’ ‘기와집개’ ‘홍산등’ 등으로 불리는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솟대와 기와집, 그리고 홍살문이 있는 지역이었으리라. 약 400년 전에 장씨, 류씨, 김씨, 양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여 마을이 커지면서 주변 소나무 동산과 논밭이 점점 택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지남들녘을 만들어낸 진남제가 시작되는 곳을 ‘언머리’라고 부른다. 이 언머리에서 동호리 수패에 이르는 둑길을 ‘언둑’이라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이 언머리는 군서면에서 생산되는 농산품과 수공예품을 실어 나르는 선창이었다. 모정리 쌀과 구림마을 대나무도 이곳 언머리 선창에서 배에 실렸다고 한다. 군서면에서 해창과 언머리에 창고가 있는 포구였던 셈이다.


물이 귀했던 동네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양장마을이 ‘소 성국(형국)’이라고 주장한다. 마을 뒤편의 커다란 곰솔나무가 있는 곳을 ‘와우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소나무 곁에 있는 정자 이름도 와우정(臥牛亭)이다.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를 ‘소뿔에 매단 꽃’으로 비유한다. 옛날 농가에서는 따뜻한 봄날, 처음 소를 끌고 들녘으로 쟁기질을 하러 가는 날에는 소의 머리에 꽃을 달아 주는 풍습이 있었다. 꽃피는 춘삼월에 일하러 가는 소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는 농부의 세심한 배려였다.

▲ 양장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지남들녘의 여름 풍경이 한폭의 그림과 같다.
마을 아래쪽에는 샘이 하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소 구시’라고 부른다. 소가 물을 마시는 그릇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박영대 씨에 따르면, 이 우물 맞은편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이 풍수적으로 동네 안산에 해당하는데,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노니는 곳이라 해서 ‘오(烏)무’라고 부른다.

양장마을은 물이 귀한 마을이었다. ‘소 구시’라고 불리는 우물이 마을에 유일한 샘이었다. 100호가 넘는 큰 마을에 우물이 하나 밖에 없었기에 이 샘은 당연히 신성시 되었다. 일제 시대 전 까지만 해도 큰 당산제를 모시지는 않았지만, 대보름날 농악을 하면서 샘굿을 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이름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소와 양처럼 순박하고 협동심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스스로를 평하고 있었다. 박영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양장마을은 물이 귀한 동네이지만, 불이 나서 집이 무너진 경우가 한 번도 없었어. 이웃집에 불이 날 경우에는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지. 부녀자들까지 나서서 집에 길러놓은 물을 가져 와서 불을 껐으니까. 물이 없을 경우에는 소변을 담아 놓은 항아리에서 오줌 물까지 퍼다 불을 껐었지.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 하나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것이여.”

이 순박하고 인심 좋은 마을에는 영암고을 어느 마을에도 없는 보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와우등’이라고 불리는 곰솔 동산이다.<계속>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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