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안녕과 풍어' 당산에게 빌었제~


 #동호마을 대보름 당산제
마을 굿이 행해지는 곳에는 당산 또는 당산 나무라 불리는 크고 신성한 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돌 제단이 있다. 당산 나무는 여러 가지의 마을 제당의 기원 전설을 가지고 있고, 대개 남성과 여성으로 쌍을 이루고 있다. 할머니 당산, 할아버지 당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산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고, 신령이 내려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무는 민간 신앙의 여러 신령 중에서 돌, 물, 동물 등 자연신의 하나로 숭앙의 대상이고, 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당산 나무를 함부로 베면 목신이 노하여 병을 일으킨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당산 나무와 같은 신성한 나무는 병을 고치고 재앙을 물리치므로, 밥이나 북어 등 제물을 그 나무에 바치기도 한다. 굿을 할 때에는 신성한 나무의 표시와 신성한 장소의 정화를 나타내기 위하여, 하얀 한지를 꽃처럼 나뭇가지에 접어서 매달거나 당산 나무에 새끼줄을 치고 5색 천을 사이사이에 매달기도 한다.

▲ 모내기 준비에 한창인 동호마을 앞 들녘
동호마을에는 바닷가 쪽에 네모난 돌(입석)을 서호지신이라 하여 할아버지 당산으로, 탐진 최씨 문각인 오돈재 마당가에 있는 400년 된 느릅나무를 당산지신이라 하여 할머니 당산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할머니 당산을 더 크게 모셔왔다고 한다. 최석연씨(73)는 “우리마을 당산제의 역사는 느릅나무 수령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짐작된다. 할머니 당산을 윗 당산, 할아버지 당산을 아랫 당산이라고 부른다. 정월 대보름날 먼저 할머니 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시고 그 다음 할아버지 당산으로 간다. 할머니 당산이 굿과 흰 꽃을 좋아한다고 해서 고깔에 흰 꽃을 만들어 쓰고 풍물 굿을 크게 한다. 당산제를 모시는 동안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칠장소지 의식을 행한다. 예를 들면, 한장 한장 소지(燒紙)하면서 자손이 없는 사람은 자손을 잉태하게 해달라고 빌고 군대에 간 아들이 있는 사람은 무사히 생활하고 돌아오기를 비는 것이지. 당산제를 맡은 유사는 과실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뽑는다. 당산제 유사로 뽑힌 사람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함부로 밖을 나다니지 못한다. 할머니 당산에서 당산제를 모신 다음에는 마을 공동 우물터에 가서 샘굿을 한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마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우물은 아주 소중하게 취급되었다. 샘은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정초에 정제(井祭)를 지낸다. 샘굿은 우물굿이라고도 하는데 대보름날 해온 전통의식이다. 마을 당제의 일환으로 하기도 하고, 마을 농악대의 지신밟기에서도 한다. 샘가에서 풍물을 치고 지신밟기를 하면서 한해 동안 우물이 마르지 않고 물이 많기를 기원한다. 이렇게 샘이 제의와 관계되고 신성시 되는 것은 샘물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샘물은 끊임이 없다. 모든 동식물의 생명의 원천이자, 낡고 묵은 것을 없애며 새 것으로 바꾸는 재생력과 정화력을 지닌다. 그래서 샘은 근원을 상징한다. 마을 사람들이 대동샘에 가서 합동으로 샘굿을 지내는 것은, 해가 바뀌었으니 마을의 모든 것이 새롭게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이루어야 할 시발의 근원을 마을 공동샘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개인이 단독으로 집에서 치성을 드릴 때, 샘물을 푸고 새 물이 고이기를 기다렸다가 제를 지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새로운 것의 근원은 언제나 새 샘물이다.

최석연씨는 마을 당산제에 대해서 계속 말한다. “샘굿을 하고 나면 그제서야 바닷가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가서 당제를 모신다. 이때에도 칠장소지를 하면서 마을의 안녕을 빈다. 우리마을 사람들은 당산제가 모두 끝나야 가정에서 제사를 모신다. 마당에 가랫불을 피우고 ‘가랫불 넘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모닥불을 넘어 다닌다. 액막이 행사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당산제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온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1950년 발발한 6.25 전쟁 때 군에 입대하여 전투를 벌인 동네 청년들 중 전사자 또는 부상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할머니 당산을 더 크게 모셔
▲ 느릅나무 할머니 당산
동호마을 두 당산터를 세 차례나 둘러보았다. 할아버지 당산은 동네 사람들의 쉼터인 수패 뒤편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소나무 아래에 있다. 네모난 입석인데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입석 아래에는 ‘서호지신상’이라고 새겨진 석상이 있고 돌 전신에 새끼줄이 감겨 있다. 바닷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안녕과 풍어(豊漁)를 기원하기 위해서 모시는 당산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동네 한 가운데에 있는 느릅나무 할머니 당산은 너른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것은 농사와 관련되어 풍년을 기원하는 동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왜 바다와 관련된 할아버지 당산보다 들녘에 인접한 할머니 당산을 더 크게 모시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동호마을은 바다와 너른 들을 함께 접하고 사는 마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업에 종사하기 보다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동호마을은 지리적으로 포구가 발달할 만한 지형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진남제 덕택으로 사방 10여리에 달하는 너른 들녘을 앞에 두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바다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다. 또한 바다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장마철에 홍수가 져서 진남제 둑이 무너질 위험에 처하면 꽹과리를 쳐서 사람들을 모아 울력을 했다. 십리평야와 관련된 동호, 모정, 양장 3개 마을 주민들은 공평하게 언둑을 삼등분하여 관리하였다. 쌀이 황금의 값어치가 있던 시절에 제방을 위협하는 바다는 이 지역 농민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해산물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들의 주요 관심은 쌀과 보리였다. 따라서 동호마을 주민들이 바닷가에 위치한 할아버지 당산 보다는 풍년을 관장하는 할머니 당산을 더 크게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계속>  글/사진=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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