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저리 한입에 막걸리 한사발 "이 맛이야"


   영암의 특산물 ‘어란’ 명성

▲ 동호마을 수패에서 바라본 언머리와 옛 영산강 갯벌
심군수 선정비가 세워진 언머리는 민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둑에는 큰 갑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언머리에서 동호리까지 이어지는 제방(지남제)을 사람들은 “언둑”이라고 불렀다. 이 언둑을 기준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바다와 갯벌이, 남쪽으로는 너른 들녘(지남들)이 나뉘었다. 언머리는 갯벌이 찰지고 윤택해서 숭어, 운저리, 대가니, 맛, 게, 조개, 망둥어, 굴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했고 맛도 또한 일품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잡힌 숭어에서 꺼낸 숭어알로 만든 어란(魚卵)은 영암의 특산물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여름이 되면 언머리는 운저리 낚시질을 하러 온 사람들과 맛을 잡으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동네 형들을 따라 이 바닷가를 자주 다녀오곤 했다.

▲ 팽나무 숲이 무성했던 동호마을 쉼터 "수패" 풍경 - 지금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언머리 풍경은 평범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멀리 시종과 도포가 마주 보이고 덕진포를 왕래하는 돛단배들이 종이배처럼 가벼워 보였다. 바닷가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었고 바위 위쪽으로는 수형이 뒤틀린 소나무들이 여러 그루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 바위 위에서 갯지렁이를 바늘에 끼워 운저리를 유혹했다. 소년들은 맨발로 갯벌 위를 뛰어다니며 게도 잡고 굴도 땄다. 물론 갯벌을 온 몸에 바른 체 수영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어른들은 운저리 낚시를 갈 때 도마, 작은 칼, 된장, 풋고추, 마늘, 막걸리 등을 챙겨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운저리 처럼 잘 낚이는 물고기가 또 있을까? 낚시 바늘을 물속에 넣기가 바쁠 정도로 입질을 해댔다. 서너 시간만 낚아도 족히 수십 마리는 낚았다. 어른들은 운저리를 잡아 올리기가 바쁘게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작은 칼로 등을 탔다. 운저리 푸른 등짝에 칼자국을 낸 다음 내장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된장과 마늘, 풋고추를 엄지손가락으로 박아 넣었다. 한 손으로 막걸리를 꿀꺽꿀꺽 들이 킨 다음 등 탄 운저리를 통째로 한 입에 베어 물었다. 입에 넣는 쪽은 언제나 머리부터였다.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은 운저리는 머리를 물린 체 온 몸을 뒤틀며 저항했다. 파닥거리는 꼬리에 뺨을 후두둑 두들겨 맞으면서도 어른들은 입에 문 운저리를 그냥 놓아준 적이 없었다.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여 마시는 운저리 안주는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긴 사람들에게 더 없는 먹거리 선물이자 보양식품이었다. 이렇게 현장에서 먹고 남은 운저리는 대나무로 만든 꼬닥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운저리 요리는 날것으로 먹는 게 최고였지만, 찌개로 끓여먹고, 초무침 해먹고, 말려서 구워먹는 등 그 조리법이 실로 다양했다.


   자존심 강한 동호마을 주민들
▲ 오돈재 마당가의 4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느릅나무 - 당산제를 모시고 있다.
동호리 갯벌은 또한 맛과 게를 잡는 인근 마을의 아낙들로 붐볐다. 바닷가 마을이 친정인 아낙들의 솜씨가 단연 발굴이었다. 이들은 어패류를 잡아다가 자급자족할 뿐만 아니라 잉여물을 돈사기도 했다. 특히 이 지역에서 생산된 어패류는 그 맛과 영양이 뛰어나 현지에서 바로 도매상인들에게 팔렸다. 동호리 주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로 농업에 종사했지만, 바닷가 생산물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동호마을 주민은 최석연(74)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동호리 사람들은 자존심이 아주 강했지. 마을 어른들은 동네 아낙네들이 맛이나 게를 머리에 이고 다른 마을로 행상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제. 그래서 갯가에서 잡은 수산물은 집에서 먹을 것만 남기고 언둑이나 수패에서 바로 도매상인에게 넘겨 부렀제. 배를 가지고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도 있었지.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전성기 때는 배가 다섯 척이 넘었제. 즉 다섯 가구 이상이 어업에 종사했었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 사람들도 양식업을 한 것은 아니었고 실장어를 잡거나 자애젓을 잡아서 도매상에게 바로 넘겼제. 아무튼 우리 마을에서는 수산물을 용기에 담아 이 마을 저 마을 이고 다니면서 하는 행상은 용납이 안 되었어.”

나는 지난주 신문사를 통해 한 통의 편지를 건네받았다. 동호마을 출신으로, 지금은 서울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최천옥씨라는 분이 보내온 편지였다. 고향의 추억을 더듬게 한 필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뒤 다만, 지난주에 연재된 동호마을과 관련된 내용 중 “영산강 하구둑을 막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며 정정을 요구했다. 동호마을에서는 한 사람도 어업에 종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동호마을을 찾아가 최석연씨를 만나 대담을 나누었고 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문이 풀렸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최천옥 시인은 동호마을 출신답게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절절하게 담은 시 한편을 함께 보내왔다. 첫 시집에 수록된 글로 제목은 “내 고향”이라는 시이다. 조금은 긴 시이지만 동호마을 옛 풍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전문을 여기에 싣는다. 


                 내 고향 
                                  최 천 옥

남도의 명산 월출산이 마을을 껴안고
넓디넓은 지남들이 마을을 감싸며
멀지 않는 곳 왕인박사 탄생하고
도선국사 전설이 내려오는 고장
동쪽에 호수란 예쁜 이름의 동호리(東湖里)
마을 바닷가 쪽에 수패란 곳이 있었다

그곳엔
몇 백 년도 넘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있었고
그 옆으론 새끼 팽나무 서너 그루 있었다
빨갛게 익은 팽 열매는 씨가 차지해 먹을 것은 없어도
우리들의 입을 즐겁게 했었지

그곳엔
어느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고운 모래가 깔린 씨름판이 있었다
장난꾸러기 우리들 약속 장소였으며
놀이터이자 꿈이 서린 곳이었다

그곳은
정월 대보름 밤이면 당산제 모시느라
꽹과리 북 장구 소리로 진동하였고
추석 명절 보름밤이면
노래자랑 콩쿨대회가 열리고
청소년들의 어설픈 연극무대도 열렸었지

그곳은
연극무대가 열리는 날 밤이면
온 동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노래자랑 콩쿨대회가 열리는 날 밤이면
옆마을 뒷마을 앞마을에서
노래깨나 부른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지

그 곳에서부터
언(堰)머리까지 이어지는 제방 둑은
젊은 남녀 데이트 장소로 제일이었고
젊은 남녀 노래방이었지
목이 터져라 노래하고 온 몸이 부서져라 춤춰도
누구 한 사람 간섭 없이 밤새는 줄 몰랐지

제방 한쪽으론 시원하게 불어오는
월출산 산바람 지남들 들바람
제방 한쪽으론 조용히 밀려오는 밀물 파도소리
그 바람 베게삼고
그 파도소리 자장가 삼아
삼복더위 한 여름 밤을 보내기도 했었지

지금은
그 산바람 그 들바람은 옛날 그대로인데
그 밀물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
그 옛날이 그립구나
그 옛날이 그립구나
추억 속에 내 고향
잊지 못할 내 고향 
                                    

 (계속)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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