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가 점지해 준 '풍요의 마을'


▲ 동호마을 입석 - 풍년과 재물을 상징하는 제비가 새겨져 있다.
동호마을은 원래 호수 가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마을 입석에 새겨진 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풍수적으로는 제비형국이다.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산이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제비가 날고 있는 형국이다. 보통 제비형국의 마을들은 연소리와 같은 제비와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는데 비해 동호리는 그렇지 않다. 아마도 바다에 인접한 마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이 굳이 입석에 제비를 새겨 넣은 것은 제비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상서로운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제비는 풍년과 재물을 가져오는 길조로 여겨진다. 우리는 제비라고 하면 판소리 다섯마당 중 하나인 <흥부전>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다. 마음씨 착한 흥부가 제비를 치료한 일로 제비가 가져다 준 박씨를 심어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제비를 인간의 재물을 관장하는 새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제비가 새끼를 많이 치면 풍년이 든다.> <제비를 먼저 보면 기쁜 일이 생긴다.> <제비가 집 안에 집을 지으면 좋은 징조다.> <제비가 집안에 집을 지으면 복이 생긴다.> <제비가 잘 번창하면 그 집안이 부귀해 진다.> <강남 갔던 제비가 이듬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집안이 망한다> <제비집을 부수면 그 집에 재앙이 온다.> 등 제비와 재물이 연관된 속담도 많다.

제비는 재물을 상징하는 새이기도 하지만 계절의 흐름을 잘 아는 새로도 알려져, 강남에 갔던 제비가 돌아와야 우리 민족은 봄이라고 하였다. 수많은 철새들이 있지만 제비를 가장 계절의 흐름을 잘 아는 새로 여기는 것은 제비를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특별한 관심 때문이다. 보통 제비는 삼월 삼짇날 왔다 음력으로 9월9일에 강남으로 간다고 한다. 3과 9라는 완전수를 제비와 연관시켜 생각하는 관습이 참 흥미롭다. 이것은 민속학의 관점에서 보면 삼신할머니와도 관련이 있다. 삼월 삼짇날은 바로 삼신할머니의 날이며 바로 이날 제비가 강남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제비가 삼신할머니의 심부름꾼으로 활약한다는 통념이 반영된 것이리라.

▲ 언머리 둑(지남제)에서 바라본 동호마을과 월출산 들녘 - 지금은 둑방길은 사라지고 신작로가 되었다.
또한 제비는 일기에 민감하여 비를 알리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비가 땅을 스치며 낮게 날면 비가 온다.> <제비가 목욕을 하면 비가 온다.> <제비가 물을 차면 비가 온다.> <제비가 분주하게 먹이를 찾으면 비가 온다.> 등의 속담이 있다. 조상님들이 실생활의 체험에서 온 지혜일 것이다.

사실 옛날에는 제비와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논흙을 물어다 집을 짓고 있으면 조그만 널빤지를 받쳐주는 정성을 보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문을 열어 놓고 도리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제비들이 방 안에까지 날아들어 날갯짓을 하고 다녀도 그냥 내버려 둘 정도였다. 제비 한 쌍이 서로 힘을 합하여 집을 짓고 알을 낳아 100일 동안 지극정성으로 새끼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린 나이였지만 이를 통하여 부모의 도리를 배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제비를 보는 일도 쉽지 않다. 초가집과 같이 제비가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는 친환경적인 주거형태가 콘크리트 집으로 변해서이기도 하고 무분별한 농약 살포와 난개발로 인한 생태계 파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과 가장 친숙하게 지냈던 제비가 우리 세대에 와서 사람들과 점차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오돈제와 400년 느릅나무
▲ 오돈재와 400년 느릅나무
마을 초입에서 신작로를 따라 안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면 조그마한 쉼터가 나오고 바로 곁에는 탐진 최씨 문각인 오돈제(五惇齋)가 있다. 오돈제는 4칸 한옥인데 처마를 길게 빼고 쪽툇마루를 빙 둘러 내달아 놓았다. 마당가에는 400년 된 느릅나무가 한 그루 있다. 군에서는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영암에서 이렇게 커다란 느릅나무는 이곳 외에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전국에서도 희귀한 고목일 것이다. 느릅나무 둘레에는 새끼줄이 쳐져있었다. 고목나무는 곧 그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최동근(70) 이장님은 동호마을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원래는 인동 장씨가 먼저 입촌해서 살았다. 나중에 탐진 최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장씨는 별로 없고 주로 최씨가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오돈제 느릅나무 수령으로 보아 탐진 최씨가 동호리에 입촌한 지는 대략 400년 전으로 짐작된다. 현재 78세대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동호리 역시 한 때는 100가 넘는 큰 마을이었으나 여느 마을과 같이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느릅나무는 골목길을 누비며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심군수 선정비
▲ 언머리 최석준옹 집 앞에 서 있는 심군수 선정비
동호마을은 동변(東邊)이라고도 불린다. 왜 동호(東湖), 동변(東邊)이라는 이름이 생겼을까? 그 대답은 서호(西湖)에서 찾아야 될 듯싶다. 서호면에서 보면 동호마을은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영암은 참 멋진 지명을 갖고 있다. 서호와 동호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동호와 서호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곳을 원머리(언머리)라고 부른다. 이 원머리는 양장마을에 속하는 지역이다. 임구령 목사는 이 원머리에서 동호리까지 제방을 쌓아 지남들을 만들었다. 바로 오중스님의 살신성인 전설이 깃든 진남제이다. 450년 전 당시에는 흙으로 된 토방이었다. 그러다보니 홍수가 지면 흙이 유실되어 둑이 무너지거나 넘치는 일이 많았다. 동호, 모정, 양장마을 주민들은 장마철이 되면 늘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원머리에서 살고 있는 최석준옹(87)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는 모정, 동호, 양장에 사는 주민들이 제방을 삼등분해서 울력을 했다. 장마가 지면 삼리 사람들이 모두 부대를 들고 나와서 흙을 채워 제방을 보수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게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이라서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심의철이란 분이 영암군수로 왔다가 이것을 보고 영암군민을 동원하여 제방을 튼튼히 보수하였다. 모정, 동호, 양장 삼리 주민들은 심군수의 선정에 감동하여 공덕비를 세웠다. 그 뒤 일제시대 때, 한 일본인이 석축을 쌓아 지남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심군수 선정비는 최석준옹 집 바로 곁에 지금도 남아있다.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은 석비이다. 군수 심의철은 1881년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가 1883년에 파직당했다. 석비는 비바람에 마모되어 글씨가 분명하지 않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郡守 沈侯宜哲 善政碑
     郎府南鎭 役灌三里 0佔海濱 財0十畓
     疏通00 林公報積 0000
     0濟00 000新

(계속)  글 / 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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