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2일과 7일 장으로 개설된 군서면 구림 5일장. 지금은 볼 수 없는 옹기전의 모습이 풍요로웠던 옛 시골의 정겨운 장터를 생각나게 한다.
1963년 9월 1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전국농업협동조합 경진대회가 개최됐다. 당시 경진대회 심사결과 영암구림이동조합이 1등을 차지했다. 당시 구림이동조합은 중앙 일간신문과 방송에서 취재경쟁을 벌일 정도로 전국에서 모범적인 조합으로 이름을 떨쳤다.
1961년 6월 1일 학암, 동계, 고산, 서호정, 남송정, 신흥동 동 6개 마을에서 300여명의 조합원으로 구성된 군서면 구림에 이동농업협동조합이 처음 탄생했다. 당시 조합장에는 최장호, 상무이사에 최철종, 이사에 최병기, 최재영, 최길호, 최금규, 최철호, 감사에 현영찬, 조재린씨가 맡아 활동했다.
구림청년회는 6·25전쟁을 전후해 침체된 마을 분위기를 되살리고 지역사회 발전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미덕을 베풀며 미풍양속을 이어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청년회원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쓰레기 수거와 하천 청소를 하고 있다.
1958년 봄, 군서면 동·서구림리에 거주하는 20~40세까지의 청년 200여명이 구림청년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최길호, 부회장에 최남두·최철종, 총무에 최금규, 재정에 조인환, 기타 임원에 최재영·최문석·최병기·조재린·최철호·최일묵씨 등이 선출했다. 당시 청년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958년 구림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군서면 동·서구림리 마을청년 14명이 벼 한가마니씩 출자하여 일심계(一心契)를 창립했다. 일심계는 방범활동과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 등 구림사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계원 중 조재민, 최병규, 최철종, 조재린, 최철호, 최재출, 최길호, 조인환, 최금규, 최일묵씨.
1950년대 구림청년들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일심계원들은 자전거를 타고 인근 해남·강진 등지를 돌며 회원들간 친목을 다지기도 했는데, 20여대의 자전거 행렬은 당시로서는 진풍경이어서 길가는 사람마다 발길을 멈추고 지켜보았으며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일손을 놓고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초등학생들까지 적기의 공습에 대비, 방공훈련을 실시했다. 사진은 1942년 영암서공립초등학교 학생들이 방공훈련을 하고 있는 광경. 남학생들은 불을 끄기 위해 지붕위로 물을 운반(사진 오른쪽)하고, 여학생은 부상자 치료 훈련을 하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후 영암서공립심상소학교를 영암서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고 식민지교육에 열을 올렸다. 사진은 1942년 당시 교문에 들어서는 여학생들이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혀 학교를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 원내)과 야외에서 근로 봉사하는 학생들. 당시 상급생들은 군복색깔의 교복에 전투모를 쓰고 맨다리에는 각반을 찼다.
1938년 당시 전교생이 군복 색깔의 교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다. 여학생은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 식민지교육이 한창이던 1938년 영암서공립심상소학교 시절의 학교 전경과 운동장에서 뛰노는 학생들의 모습. 원내 사진은 머리를 삭발한 일본인 교장.
1924년 영암공립보통학교 제13회 졸업사진. 한복에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나이 든 학생들과 양복을 입은 젊은 교사(맨 앞줄 앉은 사람)들이 같은 또래처럼 보인다.
1937년 영암공립보통학교에 있던 일본 천왕의 칙어(勅語)를 모신 봉안전과 학교 전경(아래 사진). 오른쪽 원내 사진은 당시의 일본인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