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회관 앞에 있는 재각이다. 조선조 말 김명보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건립한 재각으로 전해진다. 건립 이후 지금까지 모선강학(慕先講學) 기능의 장소로 쓰이고 있다. 정확한 건립년대는 밝혀지지 않고, 다만 1970년의 위인재기(爲仁齋記)를 비롯 1980년 하천수가 쓴 기문(記文), 그 외 차운(次韻)5개가 편액으로 남아 전한다. 건축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며, 중앙 2칸은 대청이며 양측면 1칸씩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소재지 : 군서면 월곡리 호동)
아천공 박응원(鵝川公 朴應元)의 정자다. 함양 박씨인 박응원은 김상헌·권필 등과 교분이 있었고, 성균 생원을 지낸 사람으로 특히 효행이 돈독했다고 전해온다. 현존하는 건물은 그의 10대손 박동섭이 신유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축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이며, 이 가운데 우측 2칸은 재실로 쓰이고 있고 나머지 좌측 1칸은 마루다. (소재지 : 군서면 월곡리 주암)
세류정 마을 남쪽 야산에 9기의 지석묘 군집 세류정마을의 최동현씨 집에서 남쪽으로 30여m 떨어진 야산(전주최씨 묘역)에 9기의 지석묘가 군집한다.또한 이곳은 세류정마을의 김금동씨 축사에서 남서쪽으로 200여m 떨어져 있다.서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는 백계 저수지가 있다.
풍수지리상 음기 드세‥남성상징입석 세워 마을 입구 '선독골'또는 '비석거리'에 위치한다. 입석의 생김새는 남성의 성기모양이며, 입석 앞에 마치 상처럼 네모난 상석이 놓여 있다.구전에 의하면, 송석마을은 풍수지리상 陰氣가 센 암터여서 남성을 상징하는 바위를 세웠다고 한다.상석은 자연석으로 길이 100cm, 너비 74cm크기이며, 성혈이 있다.아들이 없는 부녀자들은 시루떡, 밥, 초, 정화수를 차려놓고 손비빔을 하며 영험을 믿는다.
1960년대 영암읍 전경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영암읍 시가지는 숲이 울창하고, 읍 소재지 한가운데 도로가 뚫려 있다. 건물 대부분이 단층 건물들이며 간혹 2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2000년대 영암읍 전경영암읍을 가로질러 양쪽으로 외곽 도로가 새로 생겼으며,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월출산의 전경을 가리고 중앙로 양쪽 도로변에는 많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1960년대 영암 전분공장 준공1966년영암읍 회문리에 세워진 전분공장 준공식. 영암에서는 처음으로 덕암전분공장이 들어서 영암을 비롯한 전남지역 서남부권 농촌지역 주민들의 소득에 짭짤한 기여를 했다. 고구마를 원료로 물엿을 만들어 제과점에 납품됐으나 밀가루가 수입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어 1972년 가동이 중단됐다.
1970년대 왕인박사 유적지구림마을 동쪽 문필봉 기슭에서 자리잡은 왕인박사유적지는 왕인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자취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이 유적지는 주한 일본대사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7년에 준공식을 가졌다. 2000년대 왕인박사 유적지1996년 조성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에 불과했던 곳. 지금은 12만평의 부지에 왕인박사의 위업을 추모하는 각종 기념시설로 꽉 들어차 있다.특히 올해 개장한 왕인원에는 비지터센터인 영월관, 주무대사인 봉선대 등이 들어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금정면 용흥리 옥포 지석묘 - (1)나주-장흥간 국도에서 좌측으로 120m, 옥포저수지 둑 서쪽으로 20여m 지점의 구릉상에 총 26기의 지석묘가 있다.군집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파평윤씨 집단묘역을 조성하면서 일부 파괴되고 이동된 듯하며 대형 지석묘만 제 위치이다. 금정면 용흥리 옥포 지석묘-(2)이 중에는 석실이 노출된 것도 있고 상석 아래의 하부구조가 노출되어 있는 것도 있다.이 지석묘군은 금정에서 대표적인 유적인데 기존의 조사에서 신정지석묘군으로 보고 되었으나 옥포지석묘군으로 정정한다.
1950년대 월출산거대한 바위봉우리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월출산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함은 없다. 다만 예전엔 바위를 감싸고 자란 소나무들이 적게 자란 탓에 바위가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2000년대 월출산관광산업이 각광받는 21세기가 열리면서 숨겨진 월출산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월출산이 국토의 남단에 자리잡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등으로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다고 있다.
1970년대 덕진면 영보리 노송마을 근대화 물결이 아직까지는 밀려오지 않아 초가집이 옹기종기 자리잡고 잇는 전형적인 시골의 정겨운 모습이다. 2000년대 덕진면 영보리 노송마을초가집이 슬리브와 기와집으로 개량됐고, 마을 앞 논에는 대형유리온실로 건축된 농협육묘장이 들어섰다.
나주-장흥간 국도변의 서당골 마을 진입로 왼쪽에 민묘화 함께 6기의 지석묘가 있다.군집형태는 동-서방향으로 1호 지석묘 옆에 깨진것을 포함하여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이다. 나주-장흥간 국도에서 서당골 마을 진입로를 따라 150여m 지나면 오른쪽 논 가운데 4기의 지석묘가 있다.대형 지석묘를 제외하고 3기는 논에 하부가 묻혀 있다.이곳의 지명을 '물포바위'라고도 한다.
월출산의 구정봉에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났다. 지난 1월 31일 오전 11시 45분, 바람재에서 천황봉쪽 200여 m에서 월출산을 촬영하고 있던 박철 사진작가는 “구정봉의 새로운 형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월출산의 대표적인 바위봉우리 중의 하나인 구정봉이 선명한 사람의 얼굴로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박 작가가 이날 우연하게 발견한 구정봉은 머리·이마·눈·코·입·볼·턱수염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가 완전한 사람의 머리 형상이었던 것이다. 월출산의 바위들을 스토리텔링하여 남한의 대표적 산악관광지로 부각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박 작가는 “우리가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이 자신을 열어줄 때 그 실체를 볼 수 있다”면서 구정봉에 사람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암의 랜드마
1960년대 영암읍읍내 중심가임에도 불구하고 비포장도로와 전봇대가 눈에 들어오고, 장례행렬이 이채롭다.인근주민들이 장례행렬을 구경하고 있다. 2000년대 영암읍읍내 중심가는 반듯하게 포장된 도로를 중심으로 상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가변차로에 차량이 가지런히 주정차 돼 있어 변화를 실감케 한다.
1970년대 신북면초가집과 기와집이 면내 비포장 중심로를 따라서 정렬하듯이 배치돼 있다. 거리를 걷는 촌부와 근대문명의 상징인 TV안테나가 대조적이다. 2000년대 신북면아스팔트길을 따라 현대식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면내거리를 따라서 상가가 즐비하고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1970년대 영암읍 남풍리현 경찰서에서 터미널가는 도로로 모든 주택이 초가집이고 담벽이 흙담으로 정겨운 시골 풍경이다. 2000년대 영암읍 남풍리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현대식 마을회관이 들어서고 도로 주변의 주택들은 모두 한옥이나 양옥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보리베기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보리베기를 하고 있다. 교련복을 입고 보리베기를 하는 장면이 이채롭다. 2000년대 보리베기70년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현대화된 기계인 대형 크라스를 동원, 들녘에서 보리수확을 실시하고 있다.
1970년 모내기농부들이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있다. 모내기를 끝낸 후 논에 심어진 어린벼가 들쭉날쭉한 모양이 정겹다. 2000년대 모내기70년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현대화된 기계로 모내기를 해 반듯이 심어진 어린 벼가 일렬로 정열돼 있다. 근래에는 직파 재배도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