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8]
■ 구림마을(37)

모정마을 쌍취정 터에서 바라본 월출산 - 석천 임억령의 시는 쌍취정이 원래 초가 정자였고 요 임금의 검소의 미덕을 나타낸 고사 모자불치(茅茨不侈) 사상을 반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정마을 쌍취정 터에서 바라본 월출산 - 석천 임억령의 시는 쌍취정이 원래 초가 정자였고 요 임금의 검소의 미덕을 나타낸 고사 모자불치(茅茨不侈) 사상을 반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호남삼고’로 추앙받은 석천 임억령
쌍취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임구령의 중형인 임억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구림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인 임구령의 집인 요월당에 잠시 머무르면서 요월당과 쌍취정에 관한 시를 남겼고 이것은 구림마을을 다녀간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문곡 김수항이 담양에서 석천이 지은 쌍취정에 관한 시를 필사하여 후세에 남긴 것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은 둔암 안축, 하서 김인후와 함께 ‘세상을 초탈하여 한적하게 노닐었다’ 하여 사람들에 의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일컬어지며 뭇 사람들에게 추앙받았던 선비다. 그는 호남 시학의 스승이라 불리는 인물로 본관은 선산이며, 호는 석천(石川)이다. 아버지는 임우형이고 어머니는 참봉 박자회의 딸 음성박씨이다. 형은 임천령·임만령, 동생은 임백령·임구령이다.
임억령은 박상(朴祥)의 문인으로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이 소윤(小尹)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大尹)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하며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같은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임억령의 작품집인 ‘석천집(石川集)’은 5권 5책으로서 시 2천여 수와 제문 2편, 묘갈명 3편, 기(記)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 이황(李滉)의 ‘퇴계문집(退溪文集)’에도 임억령의 시 31편이 수록되어 있다. 
 
석천 임억령의 오언절구 5수
 
등쌍취정(登雙醉亭)

남쪽에서 북쪽을 그리워하는 꿈에 시달리다가
우연히 바닷가 산속의 술잔을 들었네
만분의 일이라도 임금님의 은혜를 갚기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전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북을 치니 모래벌의 갈매기 날고
시를 읊으니 바다도 감추어지는 것 같도다
새로 지은 정자인데도 사치롭지 않으니
띠풀로 이은 집은 요임금을 사모함인가

띠집이 높다랗게 바다에 닿아 있으니
가을 산인데도 푸르름이 옷깃에 스며오네
여관 주방에서 잔잔한 회를 올리니
모두 다 갈대숲 사이에서 낚아온 고기일레라

천지에는 만 봉우리의 청산인데
강호에는 두 사람의 백발노인이로다
한 잔 한 잔으로 반드시 다 취할지니
맛 좋은 술은 촌 항아리에 가득하네

작은 집들은 거북 등과 같은데
가을 산은 비단 무늬에 가깝도다
시기를 엿보는 마음은 모두 이미 다 했음에
나는 흰 갈매기와 짝하여 지내리라
<출처: 영암의 누정/179~180p/영암문화원>

‘낭호신사’에 기록된 쌍취정
한편, 구림마을 출신의 박이화(1739〜1783)가 쓴 낭호신사(朗湖新詞)에 보면 쌍취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요월당 높은 집은 임목사(임구령)의 랑사로다 연당의 배를 타고 형제상유 하올시고 강호백발 양령자는 쌍취정이 완연하다” 요월당은 임구령 목사의 사랑채를 말하는 것이고, 연당에서 배를 타고 형제끼리 서로 놀았다는 대목에서의 형제는 바로 석천 임억령과 월당 임구령을 지칭하는 것이다. 강호백발 양령자는 늙은 두 형제를 나타내는 말이며 쌍취정을 빗댄 표현이다. 임억령의 시 ‘등쌍취정’ 내용 중에서 아래와 같은 시구에서 따온 표현으로 보인다.

“천지에는 만 봉우리의 청산인데
강호에는 두 사람의 백발노인이로다”

충청도 선비 담헌 이하곤이 모정마을 쌍취정을 다녀간 것이 1722년이었고, 박이화가 낭호신사를 쓴 것은 그때부터 50~60년이 지난 후였다. 이 글을 보면 쌍취정이 1558년 명종 13년에 지어진 후로 200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건재했으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암거사 임호의 등장
요월당과 쌍취정을 중심으로 구림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월당 임구령과 석천 임억령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임구령의 장남인 구암거사 임호가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구암 임호는 회사정을 건립하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구림 사회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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