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7]
■ 구림마을(36)

군서면 모정마을 호숫가 쌍취정 터에서 바라본 월출산 달오름 풍경
군서면 모정마을 호숫가 쌍취정 터에서 바라본 월출산 달오름 풍경

이하곤의 월출산과 구림마을
충청도 선비 담헌 이하곤(1677~1724)은 강진에 귀양 가 있던 장인 송상기를 만나기 위해 남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농암 김창협에게 글을 배워 아마도 영암 월출산과 구림마을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1722년 10월13일부터 12월18일까지 전라도 지역을 유람하고 다수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사후에 후손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두타초(頭陀草)’라는 이름의 문집을 간행했다. 두타초는 저자 이하곤이 살던 두타산(頭陀山)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초(草)라는 이름은 아직 문집으로서의 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은 초본임을 말한다. 이 문집에는 시 묶음인 <남행집>과 기행문 <남유록>이 들어 있는데, 기행문에 다 담지 못한 내용은 시에 담았다는 것이 이하곤 문학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하곤은 11월 27일 월남촌 무위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구림마을 조윤신이 그를 만나기 위해 무위사로 찾아왔다. 월출산을 함께 유람할 목적이었다. 이하곤의 월출산과 구림마을 여행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월남촌→백운동→무위사(1박)→서쪽고개(미왕재)→도갑사→율령→용암사→구정봉(정상에 오르지 못함)→용암사(2박)→율령→상견성암→대적암→죽전암→도갑사(3박)→국장생→성기동(최씨원)→구림마을 회사정→천일재(조일귀의 집)→서호정→모정촌(조윤신의 초가집)(4박)→ 쌍취정

창녕조씨 일가와 특별한 친분을 가진 담헌 
담헌 이하곤은 구림마을 창녕 조씨 일가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월남촌 무위사를 찾아가 함께 월출산을 유람하고, 다음 날에는 모정촌 조윤신의 초가집에서 유숙하며 밤이 깊도록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보면 조윤신과 특히 인연이 깊었던 것 같다. 조윤신의 초가집에서 머물던 11월 30일 저녁에 이하곤은 ‘구림4장’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그 중에서 1편의 시를 소개한다.

모정촌에서 묵으며 주인 조윤신 덕보에게 보여주다
쓸쓸히 산사에서 이별하였는데
아련한 오늘 밤의 마음이네
꽃 핀 산에 몇몇 벗 찾아와
초가집에 등불 켜고 밤 깊어가네
두터운 정의 인척으로 통하고
사귀는 정 고금을 토론하네
마주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윽한 달이 숲에서 떠오르네

宿茅亭村。示主人曹潤身德甫。 
草草禪門別。悠悠此夜心。
花山數友至。茅屋一燈深。
厚誼通姻戚。交情講古今。
相看忘久坐。幽月欲生林。
<출처: 두타초 제10책 남행집 하(下)>

남유록에 기록된 쌍취정 
한편, 담헌은 그의 기행집 남유록에서 쌍취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1722년 11월 29일. (중략) 모정의 송림을 잘 길러 구리의 송림을 만들 것이다. 듣기로는 쌍취정의 아래에 큰 못이 있는데, 여름철이면 연꽃이 활짝 피고, 위에는 긴 둑을 쌓았는데 수양버들 만 그루를 심었으며, 아래에는 갑문을 만들어 남쪽 호수와 통하게 하여 마치 또 하나의 호심정과 같다고 하니, 그 승경이 어찌 무림보다 못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본래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고, 게다가 궁상맞은 사람의 생활을 면하지 못한다. 비록,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도 그것을 손질하고 단장하는 것은 중국 사람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문득 지목하여 우활하다고 하니 한탄스러운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이날 밤에 조윤신의 띳집에서 묵었다. 2경 뒤에 조석항이 그의 두 아우와 함께 다시 와서 닭이 울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1722년 11월 30일. 조윤신 집에서 식사를 하고 해가 높이 뜨자 비로소 출발하였다. 쌍취정에 당도하니 방죽 물은 모두 얼었고, 들의 풍광도 대단히 쓸쓸하였다. 다만, 창문을 열어 월출산의 푸른빛을 마주하니 이것이 가장 멋진 경치였다. 벽에 석천의 시가 있었는데 문곡이 뒤에 써서 걸어 둔 것이었다. 그 시의 품격과 글씨의 격조가 우아하여 볼만하였다.

 조군 형제들이 이곳에 와서 서로 전별했다. 연못을 따라 위쪽으로 몇 리 가다가 돌아보니 모든 사람들이 오히려 돌아가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는데, 자못 헤어지기 섭섭해서 그러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길을 돌아 녹동서원에 들렸는데, 연촌 최덕지 선생에게 제향하는 것이다. <출처: 두타초 책18 남유록>

남유록에 따르면 1722년 11월 29일에 구림마을 회사정에 들렀다가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던 조일귀의 집 ‘천일재(天一齋)’를 방문하여 담소를 나눈다. 그 후 터만 남은 서호정에 들렀다가 모정마을 조윤신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 날 아침에 쌍취정을 향해서 출발한다. 그 이전 일정에는 월출산 상견성암과 도갑사를 들러 시를 몇 수 남긴 것으로 되어있다. 

 아무튼, 기행문에 묘사된 표현을 잘 살펴보면 쌍취정의 주변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큰 연못, 만주의 버드나무, 너른 들녘, 창문을 열면 한 눈에 보이는 월출산 전경, 문곡 김수항이 추서한 석천 임억령의 글씨와 시, 둑방길 등이 묘사되어 있다. 바로 당시의 모정마을 호수와 들녘, 그리고 호숫가 쌍취정에서 바라본 월출산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다. 현재의 모습도 거의 그대로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저수지를 확장하면서 호수가 훨씬 커졌고 여러 차례의 공사 때문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저수지 둘레에는 크고 작은 버드나무가 여러 그루 남아 있다. 

“창문을 열면 바로 월출산의 푸르름을 대할 수 있으니, 이것이 최고의 승경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쌍취정은 내부에 조그마한 방을 갖추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담양의 소쇄원이나 식영정을 비롯한 많은 정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 여름에는 사방의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을 불러들이고 겨울에는 창문을 닫아 바람을 차단하는 용도로 쓰이던 아주 조그마한 방이다. 특히 엄동설한의 추위를 대비하여 구들장을 깔아 난방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모정마을 김학수 씨는 쌍취정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쌍취정은 임구령 목사가 진남제를 완성한 후에 중형인 석천 임억령과 함께 지은 정자였다. 규모가 꽤 컸었다. 땅바닥에서 마루까지의 높이가 높아서 꼬마들이 그 사이로 뛰어다닐 수 있었다.” 주춧돌에서 마루판까지의 높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쌍취정은 누정 양식에 가까운 정자였던 것 같다. 

한편 구림마을 선비 구계 박이화도 ‘낭호신사’에서 쌍취정을 읊었는데 석천 임억령의 쌍취정 시와 함께 다음 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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