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6]
■ 구림마을(35)

 16세기 중반 월당 임구령의 행적: 1534년 구림리 입촌, 1536년 국사암 곁에 요월당 완공, 1540년 동호리와 양장리 사이에 진남제 축조 – 십리평야 간척, 1540년 이후에 현 모정마을 큰 언덕 아래 연못을 조성하고 ‘모정(茅亭)’을 지었다가 1558년에 개축하여 ‘쌍취정(雙醉亭)’이라 명명했다. 쌍취정 연못 아래 있던 엿섬지기(약 120마지기) 논은 일제강점기 말(1941)에 모정 저수지 제방이 축조된 후에 수몰되고 말았다.
 16세기 중반 월당 임구령의 행적: 1534년 구림리 입촌, 1536년 국사암 곁에 요월당 완공, 1540년 동호리와 양장리 사이에 진남제 축조 – 십리평야 간척, 1540년 이후에 현 모정마을 큰 언덕 아래 연못을 조성하고 ‘모정(茅亭)’을 지었다가 1558년에 개축하여 ‘쌍취정(雙醉亭)’이라 명명했다. 쌍취정 연못 아래 있던 엿섬지기(약 120마지기) 논은 일제강점기 말(1941)에 모정 저수지 제방이 축조된 후에 수몰되고 말았다.

400년 만에 극적으로 만난 쌍취정기
2014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전날 밤에 머리가 허연 네 분 신선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꿈을 꾸다가 깨었다. 아내에게 그 내용을 전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전 일을 끝내고 월인당 누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춰 서더니 어른들 네 분이 차에서 내렸다. 꿈에서 본 것처럼 백발이 성성한 도인의 풍모를 갖춘 어른들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여쭸더니 한 분이 점잖게 물었다. 
“여기에 무슨 방죽이 있습니까?”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마을 서쪽에 있는 언덕이라고 해서 서재(西岾)라고 부릅니다. 방죽은 동쪽 언덕 아래 있습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옛날 우리 선조께서 이곳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사셨는데 그 터가 궁금해서 한 번 찾아와 보았습니다.” 
“혹시 그 정자 이름이 쌍취정이 아닌지요?” 
“아니, 젊은 사람이 쌍취정을 어찌 아십니까?” 
“네, 어른들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잠깐 안으로 드시지요. 다과를 드신 후에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선산 임씨 어른들과 첫 대면을 했는데 그 중 한 분이 임구령 목사의 16세손이자 종손으로 월당공의 묘소와 제실을 관리하고 있는 임선우 씨였다. 그날 모정 저수지, 쌍취정 터, 삼효자문과 사권당 등 마을 곳곳을 안내하면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정마을의 지명유래와 쌍취정에 대한 궁금점이 많았던 터라 혹시 쌍취정기문이 어디에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종손 임선우 씨는 쌍취정기와 중수기 원문을 보관하고 있다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복사본을 한 부 마련해서 건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후 일주일 뒤에 임선우 씨는 약조한 대로 쌍취정기 원문과 문곡 김수항이 쓴 중수기, 그리고 월당공 장남인 남호처사 구암공 임호와 관련된 자료를 전달해주셨다. 이러한 귀한 인연으로 인하여 400년 만에 쌍취정기를 읽어보게 되었다. 쌍취정기에도 구림이 “옛 고려의 국사인 도선이 살던 땅”임을 강조하는 문장이 나온다.

 쌍취정기(雙醉亭記)
공의 성휘는 임구령이요, 호는 월당이니, 위사공신 목사요 증 호조판서공이다. 부친의 휘는 우형이요 시호는 충순이니, 증 보작공신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영사 부원군이요, 형은 억령이요 호는 석천 또는 하의이니, 우리나라 문장이고 관찰사이며, 차형은 백령이요 호는 괴마이고 시호는 문충이니 정난위사공신 보국승록대부 숭선부원군이다. 

공은 계자요 계제로서 신유(1501년/연산군 7년)년 5월에 해남 사저에서 출생하고, 나이 34세에 출사하여 국가 포상의 공을 받고, 하사한 선물이 해가 갈수록 많아지니 그 성은이 비할 수 없었다. 처음 광주목사와 좌우승지에 임명되고 남원부사에 재임하니, 이에 그 부귀가 나라에 으뜸하고 곡물이 수만 섬이요, 노비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훈천양육은 보신처세에 오히려 장애가 된 것임을 깨닫고 달 밝고 조용한 밤이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꿈에 엄군평과 만나서 ‘분수를 알고 용퇴할 방법’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또 중국의 재상 범여가 벼슬을 그만두고 망명을 하게 된 깊은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우연히 영암 서구림에 들렸는데, 이곳은 바로 월출산 밑이며 서호의 위이고, 옛 고려의 국사인 도선이 살던 땅이며, 구거(舊居)에서 멀지 않고 서울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곳이다. 

인간 만사를 헤아릴 제 세상에서 제일 급선무는 생활경제의 길밖에 없다 하고, 진남포 일대에 축대를 쌓기로 기획하여, 창고를 개방하고 노비와 장정을 투입하여 마침내 천여석지기 토지를 개간하였으며, 한편에는 못을 파고 한쪽에는 정자를 지어 못에는 연꽃을 심고 고기를 키워서 운치를 아름답게 하고, 고기가 헤엄쳐 놀도록 꾸몄다. 

정자는 처음에 모정(茅亭)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요임금의 모자불치(茅茨不侈)라는 고사의 뜻을 취했던 것이며, 다시 쌍취정이라고 이름하여 형제 동락의 뜻을 담았으니, 지(池)와 정(亭)의 두 가지 아름다움이 서로 어울려 볼수록 더욱 아름답고, 들녘에서는 공을 칭송하는 격양가가 울려 퍼지고, 정자에서는 임금을 사모하여 멀리서 우러러 은덕을 따르는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스스로 즐기며 여생을 마치니, 화려한 세월과 태평한 세상을 이 정자에서 가히 얻었다 할 것이다. 

갑인년(1614년) 칠월 박동열 기술함
                          <출처: 선산임씨문헌록>

쌍취정 중수기
한편, 문곡(文谷) 김수항이 1678년에 쓴 ‘쌍취정 중수기(重修記)’를 보면 쌍취정이 한 번 불에 타서 다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석천 선생이 담양부사가 되어 이 정자에 놀러 와서 시를 읊었는데, 그 후 정자가 병화에 불타고 오랜 뒤에 복구하였으나 시는 흩어져서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다. 이제 마침 창평 어느 집에서 선생의 유고를 얻으니 그 시가 모두 실려있어 당시의 풍류생활을 완연히 파악할 수 있으므로 각하여 정자의 벽에 걸어 두고 오래도록 전할 것이며, 또 그 전말을 대강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리는 바이다. 그 시가 처음 지은 후 지금 다시 게시할 때까지 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왔으니 그 또한 이상한 일이로다.(1678년 4월 김수항 기록함)” (쌍취정 건립 1558년 이후 120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구림마을의 구심점 요월당과 쌍취정
모정 쌍취정과 국사암 요월당은 구암공 남호처사 임호가 박규정과 더불어 대동계를 창설하고 회사정을 짓기 전까지 구림마을 공동체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었다. 현재 모정마을 연못가에 있었던 쌍취정은 당시 구림과 주변 지역을 이해하는데 키워드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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