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3]
■ 구림마을(32)

국사암 옆모습 – 측면에서 본 국사암도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국사암을 거북바위, 즉 구암(龜巖)이라고도 불렀다. 태호공 조행립의 문집에 구암(국사암)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시문이 실려 있는데,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내용은 발견할 수가 없다. 집의 이름, 즉 당호(堂號)나 집을 지은 내력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정보를 알기가 어렵다. 반면에, 태호공 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선산인 월당 임구령과 그의 장남인 구암공 임호는 국사암 곁에 ‘요월당’이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임호의 호가 ‘구암(龜巖)’이다. 국사암 바위 상단 옆면에는 ‘구암거사 임호지려’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전해진다.
국사암 옆모습 – 측면에서 본 국사암도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국사암을 거북바위, 즉 구암(龜巖)이라고도 불렀다. 태호공 조행립의 문집에 구암(국사암)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시문이 실려 있는데,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내용은 발견할 수가 없다. 집의 이름, 즉 당호(堂號)나 집을 지은 내력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정보를 알기가 어렵다. 반면에, 태호공 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선산인 월당 임구령과 그의 장남인 구암공 임호는 국사암 곁에 ‘요월당’이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임호의 호가 ‘구암(龜巖)’이다. 국사암 바위 상단 옆면에는 ‘구암거사 임호지려’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전해진다.

구암거사 명문

국사암 상단 옆면에 ‘龜岩居士 林湖之閭 隆慶五年’(구암거사 임호지려 융경오년)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융경 5년은 1572년을 말한다. 임구령의 장남 임호는 사옹원직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1562년 11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영암에 내려와 시묘살이를 했다. 그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구림마을 국사암(구암) 곁 요월당에 거처하면서 고향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사암 곁에 세워졌던 요월당(邀月堂)
월당공 임구령(1501~1562)은 36세이던 중종 31년(1536)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건립하였고, 40세이던 1540년에 동호리와 양장을 잇는 진남제를 축조하였다. 명종 13년인 1558년 58세 때 군서면 모정리에 연못을 파고 쌍취정을 지어 중형인 석천 임억령과 함께 형제동락의 뜻을 기렸다. 
월당공 임구령은 1536년 요월당을 짓고 구림에 살면서 1562년 별세할 때까지 구림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아들인 구암공 남호처사 임호(1522~1592)는 대동계 창계와 회사정 건립 등 현재의 구림 동네의 모태가 될 만한 결정적인 역할을 남겼다.

선산임씨 문헌록에 의하면 요월당은 현재 구림리 국사암 앞에 있었으며 석천 임억령의 시를 난간에 현판하고 송천 양응정, 재봉 고경명, 지천 황정욱, 옥봉 백광훈,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백호 임제 등 여러 명사들이 출입하여 시를 돌려가 읊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정자의 동남쪽에 불을 지르다가 그 크고 아름다움에 놀라 곧 끄고 임억령과 황응정 두 선생의 시에 매료되어 그 현판을 떼어갔다고 한다. 그 이십 년 후에 외손 남곽 박동열이 나주목사 때 중수하였고, 그 후로도 후손들이 계속 관리하였으나 19세기 전후를 기점으로 결국 쇠락하고 말았다.

옛 선비들이 남긴 요월당 시 5수

요월당(邀月堂)
석천 임억령
산봉우리 기묘하니 깎아 본들 무엇하리
찾아오는 밝은 달은 마중하기 편하구나
계수나무 그림자는 계단 아래 비껴있고
물결치는 황금빛은 술잔 위에 요동친다
외로운 배게 위에 나그네 잠 못 이루고
조그마한 평상 밑에 벌레 소리 처량하네
가을 그늘 무정하게 달빛을 세우는지
새벽녘에 이슬비가 쓸쓸하게 내렸다네

요월당에서 감회를 적음 - 삼가 중부 석천(임억령) 선생의 운에 따라 지음
邀月堂 述懷 敬次 仲父 石川先生韻

구암  임호
서호 바닷가에서 돌아와 누웠더니 / 歸來湖海臥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도 그만 싫더라 / 門外謝招邀
일이라는 게 책 보는 것이요 / 事業尋黃卷
산다는 게 물 한 그릇에도 즐거움일세 / 生涯樂一瓢
임금의 은혜 내게는 멀어도 / 帝力其何我
태평성세 혼자서 노래하네 / 康衢自放謠
요월당 앞 둥근 달은 밝기만 하여 / 堂前迎皓月
백발만 소소히 반짝이도다 / 萃髮映蕭蕭

차요월당운(次邀月堂韻) - 요월당 시를 차운함

지천 황정욱
밝은 달이 언약한 듯 두리둥실 찾아오네
생각나면 쳐다보고 흐뭇하면 술잔 드네
푸른 하늘 끝 없는데 뉘가 혼자 노래하나
우두커니 서는 백발 마음만은 젊었구나

요월당(邀月堂)의 시에 차운하다. 영암(靈岩)의 임가(林家)네 정자이다.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1601)

가을바람이 오늘 저녁에 부니
 / 秋風今夕起
밝은 달을 이 당에서 맞이하네 
/ 好月此堂邀
바닷가의 사람은 옥과 같고
 / 海上人如玉
동이 속은 손으로 떠 마실 만하네 
/ 盆中手可瓢
밤이 늦었어도 잠들지 못해 
/ 夜深猶不寐
시를 지으니 절로 노래가 되네
 / 詩就自成謠
맑은 경치 머물러두기 어려움을 아느니
 / 淸景知難駐
이슬이 산쑥에 떨어지든 말든 
/ 任他零露蕭 
<출처 오음유고 제1권>

요월당에서 임 석천의 시를 차운하다〔邀月堂次林石川韻〕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 1661~1733)

두둥실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을 
/ 盈盈海上月
밤마다 정자에서 맞이하였지
 / 夜夜堂中邀
아름다운 일이 천고에 전해오니 
/ 勝事成千古
한가한 정을 한 바가지 술에 부치노라
 / 閑情付一瓢
부질없이 바라보노라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자던 약속 / 空瞻銀漢約
누구인가 옥쟁반 노래 이어 갈 사람이여 
/ 誰繼玉盤謠
슬프도다 달 속에
 / 怊悵蟾宮裏
항아의 귀밑털도 쓸쓸해졌구려
 / 姮娥鬢亦蕭
<출처 – 병산집(屛山集)><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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