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2]
■ 구림마을(31)

국사암(國師庵)=사암(師庵)=구암(龜巖) 구림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아기 도선을 버린 바위, 국사암(國師庵)’은 줄여서 ‘사암(師庵)’이라고 했다.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거북 바위, 구암(龜巖)이라고도 불렀다. 왼쪽 사진은 거북이 한 마리가 머리를 쳐들고 앞으로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 기이하다.
국사암(國師庵)=사암(師庵)=구암(龜巖) 구림마을 한복판에 자리한 ‘아기 도선을 버린 바위, 국사암(國師庵)’은 줄여서 ‘사암(師庵)’이라고 했다.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거북 바위, 구암(龜巖)이라고도 불렀다. 왼쪽 사진은 거북이 한 마리가 머리를 쳐들고 앞으로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 기이하다.

평생 국사암을 벗한 태호공 조행립
태호공 조행립은 국사암(國師庵) 앞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바위를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다. 집에 손님이 올 경우, 그는 거북 바위(구암, 국사암)를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으며, 시시때때로 거북 바위에 오르거나 앉아서 명상에 잠기곤 했다. 그가 남긴 시 속에는 국사암, 사암, 구암이라는 단어가 수십 차례나 등장한다. 국사암은 아마도 그에게 시적 영감을 가져다주는 특별한 장소였던 것 같다.
조행립은 82세가 되던 해에 ‘사암유거(師庵幽居)’(사암에서 한가하게 살다)라는 제목으로 6수의 연작시를 지었다. 시 속에는 구림촌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산수화처럼 펼쳐지고, 태호공 80년 인생의 소회가 서호의 잔잔한 물결처럼 흐른다. 제6수 마지막 구절(남자가 공훈과 명성을 이루지 못했어도/ 시비가 없는 곳이면 나의 인생 만족하리)은 숱한 곡절을 겪고도 의연하게 견디며 살아온 태호공 조행립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로 들린다.

사암유거(師庵幽居) 6수(首)
만년에 터 골라 집 지은 것이 어찌 부질없으랴마는 
앉아서 덧없는 인생 풀에 맺힌 이슬 같음을 깨닫겠네
먼 산봉우리 아득하게 정원과 들에 열리고
위태로운 난간은 아스라이 인가의 연기 속에 솟았네
남쪽으로 가로 뻗은 가학산의 구름은 골짜기로 돌아가고
북쪽을 압박하는 주룡강의 비는 못에 가득하네
나무꾼의 피리와 나물 캐는 노래 가끔 듣겠는데
석양은 한없이 앞 시내를 비추네

여름 전송하고 가을을 맞아 조그만 집에 앉았으니
더운 구름 아직도 성하여 사방이 아득하네
밭머리 우물물은 찬 기운 사라졌고
나무 끝의 여라와 토사는 돌담장에 맡겼네
배를 드러내고 맛 좋은 술 마시는 것 감내하지 못하며
정신이 피곤하여 석양을 전송하며 극진히 하기 어려워
한밤중에 광풍이 불 줄 어떻게 알겠는가
큰비가 월출산 뫼 뿌리 따라서 오네

갈대 물가 귤 동산 서리가 내린 뒤에 
시내 북쪽 산 남쪽 단풍이 붉은 때이네
속인도 아니고 중도 아닌 한 사람 검객이고
주머니도 없고 자루도 없이 노래하며 다니니 서글퍼
때로는 창강 굽이에서 말을 멈추기도 하고
길을 바꿔 푸른 기 걸린 주막에서 술 마시네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돌아가 거처할 곳을 모르니
천추에 이와 같은 자가 그 누구일까

누군들 내가 이렇게 습지에서 잘 벗어나
남쪽에 돌아와 숲과 샘 옆에 누울 줄 알았으랴
꽃과 버들에 꾀꼬리 울고 집엔 술이 가득하며
호수와 산에 구름이 걷히고 생선은 배에 찼네
동쪽에 한가한 정자 있어 사람들 반드시 찾아오고
서쪽은 돌 포구가 임해 있어 나그네 서로 맞이하네
때로는 위태로운 바위 아래 절에 내왕하기도 하는데
멀리 바라보니 도리어 최고의 신선이 된 듯 생각하네

때로는 청려장 끌고 정원의 문을 나서기도 하였지
언덕에 가득한 솔바람 소리는 귀를 혼미하게 하고
대나무 진동시키는 새소리는 객관에 들려오네
몇 잔 술 가끔 마시며 적막함 트기도 하고
피리 소리 바람에 나부끼며 어지러이 떨어지네
누가 내 뜻을 알아채고 찾아와서 서로 말해줄까
난간에 기대어 달을 기다리니 홀로 남았음이 슬프네

호수 가에서 문을 가리니 늘 한가하고 조용해
모은 일에 욕심이 없으니 태고의 정일세
반벽(半壁)의 두 그루 매화는 계절의 차례를 알고
한 하늘의 외로운 달은 분명함을 보여주네
거북바위 세 마리 학은 바람을 맞아 울어대고
유하주 일천 잔을 마음껏 기울여 마시네
남자가 공훈과 명성을 이루지 못했어도
시비가 없는 곳이면 나의 인생 만족하리

한편, 아래의 시는 구암(국사암)을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여 함께 놀았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태호공 조행립은 집 가까이에 회사정이 있어서 국사암과 회사정을 번갈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고, 집에 오는 손님들도 이 두 곳에서 주로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벗 윤겸선의 운에 차운하다
호수에 봄이 오니 남들은 모두 흥겨운데
그대만 홀로 어찌하여 몸에 병이 들었나
나는 구암을 청소하고 객과 함께 취해서
석양의 화류 속에 검은 두건을 제껴 썼네
<출처:국역 태호집/조행립 지음/태호선생기념사업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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