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0]
■ 구림마을(29)

주지봉 아래 펼쳐진 구림마을 전경
주지봉 아래 펼쳐진 구림마을 전경
서구림리 서호정마을에 위치한 국사암 전경
서구림리 서호정마을에 위치한 국사암 전경

불과 8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바닷물이 상대포까지 밀려 들어왔고 구림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1,200여 년 전 주지봉 아래 성기동 최씨원에서 도선국사가 태어나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긴 후 이 마을은 ‘쌍와촌’에서 ‘구림(鳩林)’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그 중심에 국사암이 있다. 국사암을 중심으로 남송정, 북송정, 동계리, 서호정 마을이 자리한다. 국사암은 영암도기박물관 정문에서 북쪽으로 약 100여 m 거리에 있다. 낭주최씨 문각인 덕성당과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선생을 모신 사당 ‘국암사’가 바로 곁에 있다. 구림마을을 방문한 선비들은 너나없이 국사암에 들러 도선국사를 추모하고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문곡 김수항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1675년(숙종 1년) 여름에 영암으로 유배당하여 구림마을에서 3년을 살다 돌아갔다. 연주현씨 집안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징(1629~1702)이 죽림정을 건립할 때 ‘죽림정기’와 ‘죽림정 10영’을 지었다. 문곡 김수항은 도갑사를 방문하여 ‘수남사기’를 지었고, 또한 조경찬이 살던 집에 대해 ‘안용당기’도 남겼는데, 그가 영암 구림마을에 끼친 영향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신라 진덕왕(眞德王) 말년에 영암의 성기산(聖起山) 벽촌 처녀 최씨(崔氏)가 겨울철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다 푸른 오이를 건져 먹은 뒤 배가 불러 아기를 낳았다.<白軒集 卷45 月出山道岬寺詵國師碑銘>

최씨는 갓난아기를 대나무 숲에 버렸는데 비둘기들이 날개로 감싸 보호하자 신기하게 여겨 다시 아기를 거두어 길렀다. 그 아기가 성장하여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되었다. 도선국사가 버려졌던 마을 숲은 구림촌(鳩林村)이고, 아기를 버린 바위가 바로 국사암(國師巖)이다. 

한편, 국사암은 바위 형상이 거북을 닮았다고 해서 구암(龜巖)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산인 임호는 자신을 ‘구암처사’라고 불렀으며, 태호공 조행립도 국사암 뒤편에 살면서 ‘구암유거’라는 시를 남겼다. 

문곡 김수항이 읊은 국사암
소동파가 혜주에 유배되었을 때 백수산과 불적암을 유람하고 돌아와 도연명의 〈고향 전원으로 돌아오다〉라는 시들에 모두 차운하였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 국사암이 있는데 바로 도선의 유적이다. 드디어 그 운을 사용하여 기록한다. 
(東坡謫惠州。遊白水山,佛跡巖而歸。悉次淵明歸園田詩韻。今余所寓。有國師巖。卽道詵遺跡也。遂用其韻以志之。)

〈고향 전원으로 돌아오다〉에 차운하다〔次歸園田居韻〕 
비탈진 저 국사암이여 / 陂陁國師巖
월출산과 비스듬히 마주하네 / 斜對月出山
구림에 기이한 설화 내려오니 / 鳩林徵異事
옛 자취 벌써 천년 세월이구나 / 陳跡已千年
전해 오길 바위 아래 길 / 流傳巖下路
옛적에 천길 못이었다네 / 舊是千尋淵
듣자 하니 겁회의 변화에 / 嘗聞灰變劫
상전벽해 비로소 증험했다오 / 始驗海成田
뉘 말하는가 한양 길손이 / 誰言漢陽客
유배객으로 이곳에 왔다고 / 竄身來此間
국사암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 登巖試四望
바다와 산이 눈앞에 죄다 있는데 / 海山皆眼前
앞엔 수백 호의 마을 보이고 / 前臨數百戶
저물녘 밥 연기가 이어졌구나 / 日夕連炊煙
참된 스님이 탁석한 장소인데 / 眞僧卓錫地
이끼가 바위 꼭대기 뒤덮었네 / 苔髮被巖顚
때때로 홀로 주위 서성거리며 / 有時獨盤桓
한가로운 뜬구름을 지켜보네 / 目送浮雲閒
사그라짐 어찌 따질 것 있나 / 銷沈何足論
내 맘은 참으로 유유자적해라 / 我心正悠然

<출처: 문곡집 제7권 508p/ 화도시(和陶詩) /흐름출판사>

문곡의 아들 김창립이 10세 때 지은 국사암 시

밤에 국사암에 올라

구림마을 국사암
도선의 발자취 남아 있네
밤에 국사암에 올라 바닷물을 바라보니
밝은 달이 바다 속을 비추고 있네

夜登國師巖 乙卯(1675년)
鳩林國師巖。道詵足跡在。夜登見海水。明月照海內。
<출처: 택재유타 안동김창립탁이저 澤齋遺唾 安東金昌立卓爾著 / [詩]>

김창립(金昌立)은 김수항의 여섯째 아들로 1666년에 태어나 1683년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자는 탁이(卓爾)고, 호는 택재(澤齋)다. 김창립이 10세 때 부친을 따라 유배지인 영암에 와서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있는 국사암을 답사하고 지은 시다. 형인 김창협이 지은 비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우는 위인이 아름답고 총명하며 준수하고 명랑하여 어려서부터 예리한 면이 생동하였다. 10세에 선친을 따라 남쪽으로 갔을 때 이미 당나귀를 조종하여 타고서 천리를 달리곤 하였는데, 장성하자 다시 기를 접고 느슨해졌다. 그러나 그의 의기(意氣)는 고상하고 굳세어 항상 개연(慨然)히 세속을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었다.”

미래의 관광자원 ‘도선 체험길’ 
성기동 최씨원, 조암, 성천과 국사암은 구림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도선의 마을, 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주고 미래의 비전을 가져다줄 보물 콘텐츠이자 오래된 미래다. 문수암 터에 자리한 문산재와 미륵불상, 성기동 최씨원과 조암, 서호정 국사암을 잇는 ‘도선 체험길’은 외지 관광객들에게 사시사철 구림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하는 동기와 매력을 제공해 줄 것이라 믿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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