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17] ■ 구림마을(26)

성기동 회춘바위에서 내려다본 구림마을 전경 - 도선국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지 다섯 곳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박이화의 낭호신사에 나오는 지명과 풍경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위 사진에 표기된 도선 유적지를 월출산 도갑사와 용암사를 연결하여 ‘도선체험 탐방로’를 조성한다면 구림마을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영암이 낳은 인물 도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도선 관련 문화콘텐츠 발굴은 영암의 역사문화관광 활성화를 위해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도선과 관련된 유물유적과 문헌은 차고 넘친다. 영암의 보물을 이대로 묻어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국사가 놀던 바위 몇백 년 자취인가
십 리 연파 서호강이 눈썹같이 둘렀는데
쌍룡이 구슬 물고 수구를 잘랐으니
경치도 좋거니와 살만도 하겠구나
옛 이름 쌍와촌은 돌을 보니 분명하다
뒤에 이른 구림촌은 비둘기의 숲이라네
국사가 놀던 바위 몇백 년 자취인가
<박이화, 낭호신사 중에서 >

‘도선체험 탐방길’ 서둘러 조성해야
3번과 5번에는 조그마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지만, 도선국사 탄생설화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유적지인 1번 최씨원, 2번 조암에는 안내판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구림이라는 지명을 탄생시킨 도선국사를 어찌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1. 최씨원(崔氏園)
‘도선국사 탄생지’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암 가는 길에 있는데 집터에 큰 바위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다. 오른쪽 바위 위에 ‘고최씨원 금조가장’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옛날에는 최씨 집안의 정원이었고 지금은 조씨 집안의 터다’라는 뜻이다.

2. 조암(槽岩)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곳으로 도선국사 어머니 최씨가 이곳에서 빨래하다가 물에 떠내려온 오이를 먹고 아이를 잉태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말이 먹을 물을 담아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유바위(구시바위)라는 뜻의 조암이라고 한다. 바위 하단에 조암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3. 국사암(國師巖)
도선 어머니 최씨 처녀가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아기를 버린 바위로 현재 서호정에 있다. 도기박물관 북쪽으로 약 100여m 떨어져 있는데 국사암 곁에는 낭주 최씨 문각인 덕성당과 민휴공 최지몽을 모신 사당이 있다.

4. 비죽(飛竹) 
국사암에 버려진 아기 도선을 보호하기 위해 비둘기떼가 날아간 출발지점을 일컫는다. 현재 모정마을 한옥단지가 자리한 구릉 일대를 비죽이라고 한다. 모정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이 지역을 가리켜 ‘비죽’이라고 부르고 있다.

5. 백의암(白衣岩) 
도선국사가 배를 타고 가다가 옷을 걸쳐 두고 간 바위를 말한다. ‘이 바위가 흰색을 띠면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알라.’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바위가 흰색을 띠고 있어서 주민들은 이 바위를 ‘흰덕바우’라고 부른다. 현재 백암동 마을 앞 들녘 한 가운데 있다. 영암군에서는 백의암 주변을 정비하고 소공원을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고려태조 왕건 집터를 바로잡아준 도선국사
조선 초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도선국사 탄생지 성기동 ‘최씨원’ 외에도 양택풍수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주관육익》에 이르기를,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일행 선사에게 지리법을 배워 돌아왔다. 산을 답사하는데,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혹령(鵠嶺)에 이르러 세조(왕건의 아버지)의 집을 지나다가, 그 새로 집 짓는 곳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피[穄]를 심을 땅에 【우리 말에 피[穄]와 임금[王]은 음(音)이 다르나, 뜻이 같은 까닭이다. 】 어찌 삼[麻]을 심는고.’ 하고, 말을 마치자 가니, 부인이 이 말을 듣고서 들어가 세조에게 고하였다. 세조가 황급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뒤쫓아 가서 만나 보니, 옛부터 서로 아는 듯하여 같이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함께 구령(鳩嶺)에 올라가서 산수의 맥을 살펴보았는데, 도선이 위로 천문을 바라보고 아래로 시기의 운수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땅의 맥이 임방인 백두산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이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니, 마땅히 수(水)의 큰 수[大數]를 쫓아서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하늘과 땅이 큰 수에 부응할 것입니다. 만일 이 비결대로 하면 반드시 거룩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니, 마땅히 그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비봉(秘封) 한 통을 만들어 겉봉에 쓰기를,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배하고 미래에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 대원 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드립니다.’ 하였다. 
세조가 즉시 이 비결을 쫓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이듬해에 과연 태조(왕건)를 낳았다." 한다.」
 <출처: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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