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06]
■ 구림마을(15)
중국의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후한서>의 내용을 참조하여 부여, 고구려, 삼한, 왜, 백제 다섯 나라의 강역을 지도에 그려보자. 우리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북한 황해도 대방군을 기준점으로 한다.
1. 한(韓)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海)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接境)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세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2. 부여국(夫餘國)
부여국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리(千里)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挹婁)와,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방 이천리(二千里)이며, 본래 예족(濊[族])의 땅이다.
3.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
< 출처: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한(韓)/ 후한서 동이열전>
4. 마한왕이 동북쪽 100리의 땅을 백제에게 떼어주다
온조왕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조)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을 디딜 만한 곳도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연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여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출처: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溫祚王) >
고대 사서를 읽을 때 주의할 점
- 해(海)는 바다뿐만 아니라 강, 하천, 호수, 물길 등을 나타낸다.
[집해)] 서광이 말하기를 “해(海)는 한편으로는 하(河:황하)의 의미로 사용한다.”
[集解]徐廣曰 海一作河 <출처: 史記 卷2 夏本紀 第2>
옛 사서(史書)를 접할 때 통상 ‘바다’를 뜻하는 해(海)자를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고대 역사서에 기록된 해(海)가 바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왜곡, 조작되거나 잘못 해석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다.
대륙의 황하(黃河)를 지칭하는 옛 이름은 하(河), 하수(河水), 한수(漢水), 그리고 해(海)였다. 해(海)는 바다뿐만 아니라 넓고 큰 호수와 큰 강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해(海)를 건넜다>라는 표현은 많은 경우에 <황하강이나 양자강, 또는 큰 호수나 하천을 건넜다>는 뜻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고대 역사서를 읽어야 엉뚱한 해석을 피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깊숙한 곳에서 살았던 대다수 한족(중국인)들은 동정호와 같은 큰 호수는 말할 것도 없고, 북경 자금성 곁에 있는 비교적 작은 호수나 물길도 해(海)라고 부르고 있다.
후한서나 구당서와 같은 중국의 정통 사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정통 사서인 삼국사기에도 ‘해(海)를 건넜다’ ‘해(海)를 건너 공격했다’ 등 해(海)와 관련된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 해(海)를 우리가 생각하는 동해나 서해의 수평선이 보이는 큰 ‘바다’라는 뜻으로만 해석할 경우 심각한 오류와 착각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