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04]
■ 구림마을(13)

그림1 대륙 황하강 유역에 건국된 백제( 기원전 18년 )
그림2  <백제 건국은 한수-한산-위례성의 순서로 공간이 배치되어야 한다.  전우성 유튜버 지도 참조>

< 삼국지, 후한서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세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辰韓)은 옛 辰國이다.”

그림 1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온 내용에 맞게 필자가 대략 그려본 기원 전후의 지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점이다. 한국 고대사의 기준점은 대방군, 낙랑군, 요동, 패수 네 가지가 있는데 대방군의 위치만 제대로 알아도 고대사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중국 한족은 서진군국도에 대방군을 북경 근처인 하북성에 대방군과 낙랑군, 현도군을 명확하게 그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역사서에도 대방군은 대륙의 하북성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단코 북한 황해도에 대방군이 있을 수 없다. 일단 대방군의 위치가 정해지면 그 다음은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온 내용 그대로 표기해주면 된다. 결국, 부여와 삼한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가 건국되며 그림1과 그림2는 그 과정을 간략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온조 비류 백제 1 (주몽의 아들)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高句麗)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출처: 삼국사기 백제본기/ 김부식>

온조 비류 백제 2 (우태의 아들) 

-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백제를 건국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구태 백제 – 대방의 옛 땅에 백제를 건국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출처: 삼국사기 백제본기/ 김부식>

삼국사기에 나오는 3개의 백제 건국 이야기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백제 건국에 대한 이야기는 3가지가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여러 사서를 참조하여 3가지 백제 건국설을 적어놓으면서 정작 본인은 어느 것이 옪은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3가지 이야기는 공통점이 있다. 부여의 한 갈래인 졸본부여를 토대로 하였고, 주몽과 관련이 있으며, 대방과 황하 유역에서 나라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림 2는 백제의 건국을 중심 내용으로 하여 그린 지도이다. 대륙의 황하는 한수(漢水)나 해(海)로 불리었다. 하남(河南)은 황하 이남, 즉 한수 이남을 가르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황하 남쪽에 이르러 마한의 왕에게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고, 마한 왕은 동북쪽 사방 백 리의 땅을 주어 살게 했다. 최근에 출간된 「백제서기」에 보면 마한 왕이 왜 난민에 가까운 온조 일행에게 그런 선심을 썼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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