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03]
■ 구림마을(12)

지난 호에 이어 중국의 옛 사서와 고지도에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왜(倭)의 위치를 고증해보고자 한다. 왜는 월왕 구천의 후예로서 삼한시대와 삼국시대 이후로 계속해서 부대끼며 살았던 이웃 종족이었다. 왕인이 살던 시대에도 백제 신라와 인접한 왜가 있었다.

서진군국도에 표시된 대방(帶方)
서진군국도에 표시된 대방(帶方)

「서진(西晉, 265~317)은 위나라 사마의의 손자인 진무제 사마염(司馬炎)이 건국한 국가이다. 서진은 태강지리지를 편찬했다. 이 지도에는 기원전 108년에 중국 전한(前漢)의 무제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과 현도군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낙랑군 곁에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대방(帶方) 지역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지역은 대륙의 하북성 유주(幽州)에 속하는 군현인데 북경 인근 지역이다. 

그런데 이 한사군을 터무니없게도 아무 상관도 없는 한반도 북한 평양 지역으로 비정하여 고대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끊임없는 논란에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중국 한족들이 그려 놓은 고지도에는 낙랑군과 현도군이 현재의 하북성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은 일부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과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들이 왜곡하여 날조한 반도식민사관을 쫓아 ‘북한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고 황해도에 대방군이 있었다’는 주장을 신주단지 모시듯 고수하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에 기록된 삼한과 왜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校勘. 辰韓者, 古之辰國也.
<출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삼한의 면적은 사방 4천 리

여기에서도 삼한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네 가지 기록들이 나온다. 첫째,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고 둘째, 해(海)로 한계를 삼고 셋째, 왜와 접(接)하며 넷째, 면적이 사방 4천리 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한(韓)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기준점이 바로 대방이다. 앞에서 소개한 중국 지도인 서진군국도에 대방(帶方)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낙랑군 바로 옆, 현도군 아래 위치하고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있는 하북성 지역이다. 대방은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북한의 황해도 지역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방 남쪽에 한, 즉 마한, 진한, 변한 삼한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고 그렇다면 삼한은 대륙의 황하와 양자강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삼한의 남쪽은 왜와 접한다고 했으니 왜 또한 대륙의 양자강 이남에 있었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해(海)는 우리가 생각하는 큰 바다를 말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황하나 강, 큰 호수, 하천을 가르키는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서를 해석해야 한다. 중국의 사서는 두 나라의 경계가 육지로 맞닿을 때만 접(接)한다는 표현을 한다. 삼한과 왜의 경계는 육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특히 삼한의 면적이 가장 눈에 띈다. 같은 책인 삼국지에 부여와 고구려의 면적도 나오는데 각각 사방 2천 리이다. 그렇다면 삼한의 면적이 사방 4천 리이니 고구려와 부여 두 나라의 면적을 합한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삼한의 면적은 사방 1천 리도 안 된다. 16분의 1로 축소된 면적을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에 실어 후손들에게 반도사관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큰 죄를 짓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지금의 강단사학자들은 직시하고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역사교과서를 집필하여 민족의 얼과 뿌리를 후손들에게 전해야 한다.
 
삼국지에 기록된 왜(倭)의 위치

“왜인(倭人)은 대방군 동남 쪽의 대해(大海) 중에 살고 있는데,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나라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전에는 100여 나라였는데, 한 대(漢代)에 조정에 알현하는 나라가 있었고, 지금은 사역(使譯)이 통하는 곳이 30개 나라이다.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韓國)을 거쳐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北岸)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거리가 7천여 리이며, 처음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는데, 1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중략) 그 인민이 때로는 회계(會稽)에 와서 교역하기도 하였다. 회계 동야현(東冶縣) 사람 중에 바다에 들어가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단주(澶州)에 도착한 자가 있었다. 대단히 멀어서 왕래할 수가 없다. 대방군에서 여왕국에 이르는 거리는 1만 2천 리이다.”
<출처:삼국지 권30 위서 30오혼선비동이전 제30 왜(倭)>
 

명나라 1566년 제작된 지도 – 대륙 동부 해안에서 살았으므로 중국 지도에 해외(海倭)라고 표시해 놓았다.
명나라 1566년 제작된 지도 – 대륙 동부 해안에서 살았으므로 중국 지도에 해외(海倭)라고 표시해 놓았다.

진서(晉書)에 기록된 왜의 위치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섬으로 나라를 이루고 있어 그 땅은 산림이 많고 좋은 밭은 없으며 해산물을 먹고 산다. 옛날에 백여 개의 작은 나라가 서로 인접해 있었으며, 위(魏)나라 대에 이르면 삼십개국이 위(魏)와 통교하게 되었다. 호(戶)는 7만이다. 남자는 성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한다. 스스로 태백(太伯)의 후손이라 하였다. 또 아주 옛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모두 대부(大夫)라 자칭하였다고 한다. 

옛날 하(夏)나라 소강(小康)의 아들(월왕 구천)이 회계(會稽)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여 교룡의 공격을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지금 왜인은 잠수하여 물고기를 즐겨 잡는데, 왜인 역시 몸에 문신을 해서 해로운 바다 짐승을 막고자 하였다. 그 위치를 따져 보면 회계군 동야 동쪽에 해당한다.”
<출처: 진서(晉書) 권97 제67 동이(東夷) 왜(倭)>

명나라 1643년 제작된 지도, 절강분계도에 회계와 일본이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일본은 회계 동남쪽에 있는 이주(夷州), 현재의 대만(타이완)을 가르킨다.
명나라 1643년 제작된 지도, 절강분계도에 회계와 일본이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일본은 회계 동남쪽에 있는 이주(夷州), 현재의 대만(타이완)을 가르킨다.

대륙의 하북성 대방군에서 남쪽 왜국에 이르는 길

(중국의 사서와 고지도에 나온 내용을 참조로 하여 초기 왜와 삼한을 지도에 그려보았다. 삼한은 대방 남쪽에 있고, 왜는 한(韓)의 남쪽에 접한다. 왜는 대방군의 동남쪽 대해(큰 바다) 가운데 산이 많은 섬에 살고 있다. 특히 회계 동야 동쪽 해안에 있으며 담이와 주애에서 산다. 양자강 이남에 있으며 월나라에 거주하는 월족이다. 이주(타이완=대만)는 명나라에서 편찬한 지도에 일본국으로 표기되어 있다. 사서에는 왜국의 왕이 여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비미호(卑彌呼)라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부여와 삼한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되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도 왜와 함께 동이(東夷)에 포함되며 동시대를 헤쳐나가게 된다. 백제가 사서에 나온 것처럼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건국되었다면 왕인박사가 태어났다는 백제의 건국 위치는 어디였을까?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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