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과 왕인 - 6

김창수 옹이 1975년에 발간한 저서, 박사왕인 오늘날 영암 구림마을에 왕인박사 유적지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전북 정읍 출신의 김창수 옹은 1968년 일본을 방문하여 우에노 공원에 세워진 「박사왕인비」를 처음 찾아보고 느낀 감회를 본인의 저서에 남겼다.
김창수 옹이 1975년에 발간한 저서, 박사왕인 오늘날 영암 구림마을에 왕인박사 유적지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전북 정읍 출신의 김창수 옹은 1968년 일본을 방문하여 우에노 공원에 세워진 「박사왕인비」를 처음 찾아보고 느낀 감회를 본인의 저서에 남겼다.

김창수 옹의 「박사왕인비」 친견 소감

“동경에서 여장을 풀고 아좌곡(阿佐谷) 병원장 조인제 박사의 안내로 상야(上野)공원 드높은 곳의 수목 울창한 경내에 의연하게 서 있는 두 개의 비를 찾아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훌륭한 우리 조상의 비였다. 하나는 대리석으로 높이 10여척이나 되는 정비이고 다른 하나는 5척 정도의 부비(副碑)였다. 정비에는 앞뒤로 한문 글씨가 가득 차 있고, 부비에는 일본글자로 앞뒤가 메어져 있다.(정비의 내용은 구림마을 8편에서 이미 소개했으므로 참조 바람)
이 비문을 읽고 우리 선현 왕인이 얼마나 일본땅에서 숭앙받아 왔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부비의 일본글자는 정비와 대동소이한 내용인데 다만 그 뒷면에 이들 비석을 세울 때의 협찬자 명단이 열거되어 있어서 주목되었다.

즉, 이 비석을 세우는 데는 창덕궁에서 은자(恩資)을 하사했으며 일본에서는 집권자인 근위수상(近衛首相)을 비롯하여 황족 전체와 고관, 문학자, 승려, 정치가 등 각계를 망라한 명사 2백30여 명이 참여함으로써 그야말로 거국적인 행사였음을 엿보게 하였다. 여기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 있다. 즉, 이 왕인비가 세워진 것은 일제(日帝)가 소위 「지나사변(支那事變)」을 조작한 뒤이며 2차대전 발발 직전이다.”

김창수 옹은 독립운동가 출신답게 일제가 백제 왕인을 거국적으로 내세운 이면에 정략적인 술책이 숨어 있음을 간파하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일제(日帝)의 정략적 이용

“특히 우리 민족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 하에 영어권(囹圄圈)에 몰아넣으려고 정략(政略)을 농할 때인 만큼 침략전쟁 준비에 몰두했던 군국주의자들의 불순한 내용이 여기에도 잠재해 있는가 싶어 꺼림칙했다. 더구나 거기에 열거된 13명의 한국인들은 친일파라는 지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 점은 유난히 가시처럼 들어왔다. 하여간 왕인의 역사적인 존재가 일제에 의해 정략적으로 이용된 느낌도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주객이 바뀌었다고 하겠으니 이 역시 우리가 역사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출처: 박사왕인 39p ~ 41p/김창수/1975>

김창수는 누구인가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김창수 옹은 일제가 우에노 공원(상야공원)에 박사 왕인비를 세운 의도를 명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창수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전라북도 정읍 출신으로 1901년에 태어났다. 중국 상해대학을 졸업했다. 일제강점기에 농민운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10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후 자유당 집권기에 정읍에서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대한농민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1968년에는 4개월 동안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후 농촌을 답사, 농업협동조합의 운영방법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대판시(大阪市)에 있는 왕인묘, 동경(東京)에 있는 박사 왕인비 등을 찾아보고 왕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김 옹은 1970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5개월 동안에 걸쳐 관동·관서·구주(九州)지방에 있는 박사 왕인과 그 후손들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관계자료를 모아 가지고 귀국하여 이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 옹은 「일본에 심은 한국의 얼」이라는 글을 1972년 8월부터 10월까지 총 15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연재함으로써 뜻있는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출처: 박사왕인 서문 7p ~ 8p/김창수 저/1975>

영암서 날아든 편지 한통

그러던 중 영암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JCI영암청년회의소 회장 강신원이 김창수 옹에게 영암에 왕인과 관련한 전설과 유적이 많다는 취지로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남 영암에서 믿음직한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영암청년회의소 회장 강신원 씨였다. 내용인즉, 중앙일보에 연재한 졸고 「백제현인 박사왕인이 위업(일본에 심은 한국의 얼)을 읽고 한·일 고대사 관계에 대해 깊이 감명하여 민족의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면서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와 서호면 성재리 등지에는 백제 때 왕인박사의 유적과 전설이 많다』고 했으며 끝으로 놀랍게도 ‘영암이 낳은 위대한 인물로서 왕인박사의 국위선양기념비를 완성 불원 제막식을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흥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출처: 박사왕인 199p ~ 200p/김창수/1975>

이 편지를 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 옹은 곧 영암을 방문하기 위해 여정을 꾸렸다. 그는 1972년 10월 19일과 1973년 3월 두 번에 걸쳐 2주 동안 영암 현지를 답사했다.

옛 선비들 시문 기록에도 흔적 찾을 수 없어

하지만, 군서면 구림리와 서호면 성재리 등지에 왕인과 관련하여 무슨 유적과 전설이 많이 있었단 말인가. 통일신라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수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구림마을에서 문중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들은 여러 문집과 기록을 남겼는데, ‘왕인’이란 말이 단 한 마디라도 나온 책이나 자료가 있는가? 만일 왕인이 그토록 훌륭한 구림출신 학자였다면 영암 유배객인 문곡 김수항, 김창협, 구암공 임호, 고죽 최경창, 오한 박성건, 태호공 조행립, 구계 박이화, 죽림공 현징, 남곽 박동량 등의 기라성 같은 구림마을 선비들이 어찌 왕인을 외면하고 시 한 편 안 남길 수 있었겠는가? 문산재와 관련한 수십 편의 시를 비롯한 기록에 어찌하여 왕인이 언급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왕인이 영암 구림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정치 승려 아오끼가 일제의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돕기 위해 ‘왕인동상 세우기 운동’을 벌이면서 도선국사와 관련한 백의암 전설을 왕인 도일 전설로 둔갑 조작한 것을 제외하면, 과거 1700년 동안 영암지역에 아무런 흔적도 기록도 구비전설도 없었던 왕인이란 인물이 김창수 옹이 시작한 왕인박사 연구 일로 말미암아 갑자기 구림마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창수 옹은 이때의 일을 자신의 책에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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