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과 왕인 - 6

군서 모정마을 벽화의 거리에 있는 구림조연(鳩林朝煙) 그림. 모정마을 원풍정 12경 중 하나로 ‘구림마을의 아침 연기’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군서 모정마을 벽화의 거리에 있는 구림조연(鳩林朝煙) 그림. 모정마을 원풍정 12경 중 하나로 ‘구림마을의 아침 연기’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왕인 띄우기

일제는 내선일체 정책을 통하여 조선인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공작을 벌였는데 그중 하나로 왕인박사를 모델로 삼는 것이었다. 강제병탄 직전인 1894년부터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왕인박사 띄우기 사업을 약 50년 동안 국가 프로젝트로 진행하였다.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1899), 왕인신사봉찬회의 결성(1927), 박사왕인비 건립(1940) 등 세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

1894년 명치 천황 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노일전쟁 대 참모총장)가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 사업을 발의했으나 잠시 중단되었다가 1899년에 공사를 재개하였다. 인덕천황 1500년제라는 부제를 달고 왕인분묘 대제전이 오사카에서 거행되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왕인묘는 진짜 왕인묘가 아니라 ‘전(傳)왕인묘’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보수공사에 필요한 기부금을 희사했는데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카쓰라 타로 등의 최고 권력자들이 참여했다. 야마가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이끌었던 인물로 ‘일본육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제국주의자다. 카쓰라 타로는 러일전쟁 직후 미국과 “카쓰라-태프트”조약을 체결하여 ‘필리핀을 미국에 넘기는 대신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밀약을 맺은 인물이다. 이 카쓰라-태프트 밀약은 후에 을사늑약(1905)으로 이어졌다. 조선 침략의 3대 원흉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왕인묘역 확대정화공사 프로젝트’는 그들이 ‘국조문교의 조’라는 칭호를 붙인 왕인박사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는 순수한 마음에서였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들의 목적은 그들이 은밀하고도 노골적으로 추진해온 한일병탄 이후 조선식민지 경영에 백제 도래인 박사 왕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왕인신사봉찬회의 결성

1927년 ‘왕인신사봉찬회’가 동경에서 결성되었다. 말 그대로 왕인신사를 결성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단체이다. 재일사학자 김영달은 ‘위사조선-왕인의 묘지와 탄생지’라는 책에서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1927 왕인신사봉찬회 결성
1930 왕인신사 건설 봉고제 및 지진제(地鎭祭) 거행
1940 왕인박사현창회가 우에노 공원에 박사왕인비 건립
1941 왕인신사건설의 제일보로서 왕인묘에 담장 조영
1941 토쿄 우에노 공원에 박사왕인 부비 건립
1942 오사카부 협화회가 왕인신사의 건설 결정

이와 때를 맞춰 조선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은 ‘내선일체에 공헌이 많은’ 왕인신사 건립을 홍보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지금으로부터 일천육백오십여년전의 옛날 백제로부터 논어, 천자문을 가지고 응신천황의 어대에 도일하여 내선일체 공헌이 많은 성인 왕인박사의 공적을 현창하려고 대판부지사 지전청(池田淸)씨가 주창하여 대판부 북해내군 관원촌 광산에 왕인신사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는바 조영공사비 약 이백만원의 기금도 되게되였스므로 근간 착공하기로 되었는데 내선일체의 존숭한 표증이라고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숭경하여 마지않는다고 한다(조선일보 1938.5.8.).”

 또한 아오키라는 영산포 사찰 일본 승려도 이 시기에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느닷없는 왕인박사 동상 세우기 운동을 벌였다. 구림마을에 전승되어 온 도선국사 관련 구비전설과 설화를 가져다 왕인 전설로 둔갑시키고 조작 날조하여 구림마을의 전통 선비정신을 왜곡시키고 훼손시킨 주범이 바로 아오키라는 일본 정치 승려다. 오늘날 어쩌다가 저런 사기꾼 왜인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가 우리 영암이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루빨리 왕인이라는 허상을 걷어내고 구림마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영암이 살고 구림이 산다.

박사왕인비 건립

1940년, 일본 토쿄 우에노ㅍ 공원에 건립한 박사왕인비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비석은 ‘박사왕인비’와 ‘부비’ 2개로 이루어졌다. 지금 현재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정비 비문의 작성자는 조낙규이고, 부비의 작성자는 ‘요쓰미야 겐조’다.
조낙규가 찬한 비문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백제 구수왕이 아직기로 하여금 천황에게 말을 바치게 하고 일본의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천황은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왕인을 징발하여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오게 하였다.(중략) 오호라! 왕인은 비록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은 거국적으로 왕인을 숭모하였는데, 우리 조선인은 조선의 선철군자를 받들지 못하였으니 어찌 유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공자는 춘추시대에 나서 만고의 인륜 도덕을 밝혀서 천하만세에 유림의 시조가 되고, 박사 왕인은 공자 몰후 7백 60여 년 만에 조선에 나서 일본국 태자에게 충신효제의 도를 가르쳐 널리 나라 안에 전수해 1천653년을 계승하여 왔다. 천고의 왕인박사의 위업이야말로 유구유대하며 끝이 없다. 여기 비석을 세우는 것은 오직 그가 끼친 덕에 보답하려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동방의 문화에 천만년토록 보익(補益)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후학 조선인 조낙규 찬”

비석 내용에 ‘천황은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왕인을 징발’했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왕인의 후학이자 조선 유림을 대표한다는 자가 본인의 순수한 의지대로 쓴 비문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굴욕적인 표현이다. 일제가 어떤 의도로 박사왕인비를 세웠는지 독자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때 징발된 왕인이 일본 천황가에 충성을 다했듯이 조선인들도 왕인을 본받아 내선일체 정책에 일조해야 된다는 취지로 읽힌다.

부비에는 비석 건립에 후원금을 낸 230명의 명단을 새겨놓았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을 지낸 악질적인 제국주의자 ‘미나미 지로’는 겨우 36번째 위치를 차지할 정도니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박사왕인비 건립을 얼마나 거국적으로 추진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박사왕인비 낙성식에는 국내외에서 수많은 축사와 축전이 도착했는데, 그중 경기도지사가 보내온 축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현 왕인비 건립은 내선일체의 교화에 경하할 일이다.”

한편 오늘날 왕인박사를 영암 구림마을에 가져다 놓는 데 제일 큰 역할을 한 전북 정읍 출신 김창수 옹도 우에노 공원에 있는 이 비를 친견하고 소감을 남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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