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과 왕인-4

왕인에 대한 문헌 재고찰

일본 <고사기>에는 응신 20년(서기 289년)에 백제가 보낸 와니키시(和邇吉師)로, <일본서기>에는 응신 15년(서기 284년)에 왜의 장수 황전별과 무별을 백제로 보내 데려오도록 한 왕인(王仁)으로, 그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인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한편, <속일본기>에는 왕인의 출생 가문이 기록되어 있다.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聖朝)가 사신을 보내어 문인(文人)을 부르심으로 하여, 구소왕은 곧 왕구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이는 후미(文), 무생(武生) 등의 시조이다. 이에 모오토 및 진상(眞象) 등 8인에게 스쿠네(宿祢)의 가바네(姓)을 주었다.” 왕인은 한나라에서 백제로 망명한 한족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위에서 언급된 일본의 사서를 참조하여 왕인에 대해 기록해 놓았다. 실학자 이덕무도 <천장관전서>에서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두 사람 역시 왕인의 출생가문만 밝혔을 뿐 탄생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다.

“왕인은 백제국 사람인데, 본디는 한(漢)나라 고제(高帝)의 말손(末孫)이다. 고제의 후손 가운데에 난(鸞)이란 사람이 있으며, 난의 후손 가운데에 왕구(王狗)란 사람이 있고, 왕구의 후손이 왕인이다. 왕인은 여러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또 사람들의 관상(觀相)을 살필 줄 알았다.”

유학자 이병연의 주장 근거는?

그런데 유학자 이병연은 1937년에 출간한 「조선환여승람」 영암군 지지편에서 느닷없이 성기동을 왕인박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주장했다. “성기동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백제 고이왕때 박사 왕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라 진덕왕에 국사 도선이 이곳에서 태어난 이유로 성기동이라 말한다.”

일본의 사서나 조선 실학자들의 저서에는 왕인의 출생가문이 백제로 망명한 한나라 유방의 후손이라는 기록만 나올 뿐 왕인의 탄생 지역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없는데, 이병연은 무슨 근거로 이런 대담하고 황당한 주장을 했을까 몹시 궁금하고 의아스럽다.

일제는 조선 침탈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왕인 박사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내선일체’라는 그들의 식민지 지배 논리를 선전하고자 했다. 친일파들을 동원해서 동경 우에노 공원에 왕인 박사를 기리는 비석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앞장서서 오사카의 왕인 묘 근처에 왕인신사를 세우기도 했다. 비석에 성금을 낸 조선의 이름난 친일파 이름들이 13명이나 새겨져 있다. 이런 시류에 편승하여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라고 하는 일본인 승려가 1932년부터 느닷없이 영암 구림마을에 왕인 동상 세우기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왕인 영암출생설의 시작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병연이 보낸 조사자들은 아오키가 떠들어댄 말을 기억하고 있던 마을 주민들의 몇 마디 말을 듣고 성기동이 왕인 탄생지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왕인 동상 건설 취지문과 당시 우리나라 언론들이 보도한 왕인 관련 기사를 원문 그대로 싣는다. 도선국사 백의암 설화를 왕인 도일설화로 인용하면서 궤변을 늘어놓는 아오키의 연설은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조작 술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언론보도를 보면 1940년대로 갈수록 영암출생설은 사라지고 충남 부여가 왕인 출생지로 부상하고 있다.

아오키의 왕인 동상 설립 운동

아래 내용은 김선희 박사의 논문 ‘근대 왕인 전승의 변용양상에 대한 고찰’ (2012/ 51p ~52p)에서 발췌한 것이다.

「전근대 형성된 왕인 전승은 근대에 들어와 한국의 일반 대중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왕인 전승이 널리 알려지는 것과 비례하여,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기 위한 시도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왕인 전승은 내선일체 등 한국과 일본의 역사·문화적 동질성 홍보에 적합한 사례로 부각되어 일종의 변용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제강점기 동안 왕인 전승은 원형으로부터 변형되어 가는데, 왕인 전승 변용의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왕인의 영암출생설이다.

왕인 영암출생설의 시작은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 본원사(本願寺)의 주지였던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로 부터였다. 영암과 인접한 나주 영산포에 있던 본원사는 정치적 색채가 강한 종파였던 일본불교 정토진종 대곡파에 속한 사찰로, 영산포 본원사 주지였던 아오키의 행적을 살피는데 있어서 주요하게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영암의 성기동에서 왕인이 출생했다는 주장은 아오키의 왕인박사 동상 건설 취지문에서 처음 제기되었고, 이후 왕인 영암출생설의 근거로 이용되어 영암지역의 대표적인 왕인문화축제의 기반이 되었다. 그간 왕인 관련

논저에서도 취지문의 일부분만 발췌 인용되고 전문이 소개된 적이 없기에, 본고에서는 다소 길어지지만 전문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박사 왕인 동상 건설 계획

1932년(쇼와7) 5월 7일 저녁

전남 영산포 본원사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

취지

박사 왕인은 1650년 전 인황(人皇) 16대 응신천황의 뜻을 받들어 백제 구소왕(久素王)의 추천에 의해 내공(來貢)하여, 처음으로 전적(典籍)을 헌상하고 문교(文敎)를 전하고, 두 황자(二皇子)를 훈육(薰育)하였다. 이후 삼조(三朝)에 역임(歷任)하였다. 그 덕정(德政)은 원래 하늘이 주신 성명(聖明)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해도, 박사의 공적은 역사에 분명히 기록할만한 것이니 어느 누가 박사의 성심을 느끼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박사는) 원래 타국의 신하로 훌륭함이 이와 같고 지금은 일선일가(日鮮一家)가 되었으니 자못 추모의 정신이 있다. 황태자 토도치랑자(菟道稚郞子)가 고려 표상(高麗表狀)의 무례를 배척하신 것이나 응신천황이 붕어하실 때, 곤상계하(昆上季下)의 대의(大義)를 밝히신 것과 같다. 이중(履中)천황이 한국사(韓國史)를 두고 제장과 내장(齊藏內藏)을 구별하여 박사가 친히 공조(貢調)의 출납을 등부하신 것과 같다.

박사는 성황(聖皇)의 제사(帝師)이자 문교의 시조(始祖)이다.

세대는 요원하여 만물이 별과 함께 변하여 박사의 옛 땅인 영암군 구림(靈巖郡鳩林)의 유적은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구전될 뿐이니,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박사는 제사(帝士)의 그릇을 품은 까닭에 옛 땅에 작별인사를 하고 배에 올라 닻줄을 풀어 해상으로 서로 멀어지니 석별의 정을 참을 수 없다. “나는 지금부터 일본으로 간다. 군중을 위하여 입은 옷을 벗어 여기에 남긴다.

이 옷의 색깔이 변하지 않는 한 나는 일본에서 죽지 않은 것으로 여김이 마땅하다.” 위대한 말씀이로다.

박사의 큰 생명은 천년 후에도 명명하여 일동(日東) 제국에 건재하며 국풍을 순화하여 나날이 새로운 것이 있었다. 옷 역시 그 색이 변하지 않아 바다 가운데 있어 옛 땅의 사람들이 모두 왕인은 지금도 일본에 살아 있다고 여겼으니, 분명하다 할 것이다. 나는 관청의 허가를 얻어 이 영적(靈跡)을 장엄하게 박사의 동상을 건설하여 국민보초(國民報初)의 성의를 다하고자 한다. 이는 실로 재조선(在鮮)의 인사(人士)의 장거한 일일 뿐 아니라, 융화선감(融和善感)의 쐐기가 될 것이다.

박사의 영혼도 또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을 할 것이다. 대다수 유지의 열성적인 찬동을 삼가 바라며 아름다운 협력(脇力)의 영광을 주시기를.」

「왕인신사불원착공」

지금으로부터 일천육백오십여년전의 옛날 백제로부터 논어, 천자문을 가지고 응신천황의 어대에 도일하여 내선일체 공헌이 많은 성인 왕인박사의 공적을 현창하려고 대판부지사 지전청(池田淸)씨가 주창하여 대판부 북해내군 관원촌 광산에 왕인신사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는바 조영공사비 약 이백만원의 기금도 되게되였스므로 근간 착공하기로 되었는데 내선일체의 존숭한 표증이라고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숭경하여 마지않는다고 한다(조선일보 1938.5.8.).

「백제의 학자 왕인 대판에서 신사건설」

대판에 조선의 학자 왕인의 신사를 세운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오던바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으로 있었던 지전청(池田淸)씨가 대판부지사로 착임한 후 일지사변(日支事變)까지 발발하자 이것의 필요를 더욱 느끼고 대영단을 내리어 내선융화의 한 표증으로서 이번 대판부 하북하내군 환원촌광산에 왕인신사를 건설하기로 되었다. 비는 약 이백만원으로 불원해서 착수할 예정인 바 조선관계 방현에서는 자진하여 이 사업에 조력할 것인바 이 왕인박사는 일천육백오십년전 백제사람으로서 응신천황시대에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와서 일본문화에 공헌한바가 많은 만큼 일반의 환영을 더욱 받으리라 한다(동아일보 1938.5.9.).

「왕인박사의 건비 각지에서 회원모집」

백제시대에 논어와 천자문을 내지에 소개하여 일본문화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한 왕인박사의 유덕을 추모하는 사궁헌장(四宮憲章), 정상철차랑(井上哲次郞), 중산구사랑(中山久四郞)씨 등의 발기로 동경상야공원 일우에 왕인박사의 비석을 세웠거니와 그 건비제막식후에 축하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도 다시 왕인회를 설립하기로 만장일치 결정하고 지금 본부를 동경황명회(皇明會)안에 두고 문부성, 동경부,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얻어 왕인회원을 대대적으로 모집중이라는데 그 회에서는 왕인회의 취지를 철저케하고자 사궁헌장씨가 조선에 와 지금 각지로 돌아다니며 회원을 모집중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 회에서는 조선 부여(扶餘)의 왕인 생탄지와 그분 묘지인 대판부에 왕인비를 건설할 터이라고 한다(조선일보 1940.8.8.).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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