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 표지 –이 책 영암군 지지편 명소 성기동이 왕인의 출생지로 나오며, 인물편 중 명환(名宦)에 왕인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성기동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도선 국사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곳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도선 국사 탄생지 최씨원이다. 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본의 사서인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왕인이 ‘백제에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왔다’는 내용이 나오고, 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한나라 유방의 후손인 왕구의 손자다’라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인이 구체적으로 백제의 어느 지역 출신이었다라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항일투쟁기 하에 조선에서 전라남도 영암이 왕인의 출생지라고 하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1937년에 간행된 이병연(李秉延)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영암군 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 지지편 명소 성기동이 왕인의 출생지로 나오며, 인물편 중 명환(名宦)에 왕인이 소개되고 있다. 왕인이 영암 성기동에서 태어나 고이왕 때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오사카 히라카타에 그의 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갑자기 1600년 만에 왕인 출생지를 언급했던 것일까? 우선 「조선환여승람」이 어떤 종류의 책인 가를 살펴보자.

이병연의 「조선환여승람」

충남 공주(公州)의 유학자인 이병연(李秉延:1894∼1977)이 1910년부터 100여 명을 동원, 12년 동안 전국 13도 229개 군 가운데 129개 군을 직접 조사하여 편찬한 백과사전적인 지리서이다. 1990년 그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편찬을 마친 후 간행 기간만 16년이 걸린 이 지리서는 129개 군 중 26개 군의 내용만 책으로 제본되어 보급되었을 뿐, 나머지 103개 군의 것은 일제의 감시와 재정난으로 미결책(未結冊)으로 보관되어왔다. 내용은 조선시대의 《신증 동국여지승람》(1530)과 《대동지지》(1864)를 바탕으로 국토의 변화된 모습을 새롭게 기술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31개 항목이 조사되어 있으며,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42개 항목이 조사, 편찬된 데 비하여 이 지리서는 49개 항목을 조사, 편찬하였다. 책의 체재는 가로가 20㎝이고 세로는 29㎝인 한지에 목판과 활자를 함께 사용하여 인쇄되어 있다.

각 군(郡)을 독립된 한 권의 책으로 만들도록 되어 있으며 군세가 약한 곳은 100여 쪽 정도이고 큰 군은 300여 쪽에 달하는 큰 분량으로 편찬되어 있다. 각 권에는 서(序), 조선지리총설, 조선 명의, 조선 위치, 조선 경계, 조선 연혁, 조선 인종, 조선 방언 등을 앞부분에 공통으로 넣은 뒤 각 군에 관련된 인문 지리 현황을 49개 항목으로 나누어 게재하였다.

이 항목들에는 군건치연혁(郡建置沿革)·신구속현(新舊屬縣)·군명·산천·군세·명소·사찰·학교·명묘(名墓)·토산·기차역·교량 등 지리에 관계된 것들과 유현(儒賢)·학행(學行)·명신·문행(文行)·청백·선행·효자·효부·효녀·정렬 등 인문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군은 충남 14, 충북 9, 경북 17, 경남 20, 전북 13, 전남 24, 강원 9, 황해 6, 함남 8, 함북 6, 경기 ·평남 ·평북 각 1개군 등 모두 129개 군이다. 

<목활자본. 70책. 한지. 한문체. 1922∼1937년 보문사(普文社) 발간.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참고문헌 – 두산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환여승람」의 왕인 기사

성기동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백제 고이왕 때 박사 왕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라 진덕왕에 국사 도선이 이곳에서 태어난 이유로 성기동이라 말한다.

왕인(王仁) :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때 박사(博士) 벼슬을 맡아, (경전의) 깊은 뜻에 정통하였다. (고이왕) 52년 을사년(285)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면서, 야공(冶工)과 양조인(釀造人) 오복사(吳服師)를 거느리고 갔다. 응신천황(應身天皇)에게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여 가르쳐, 경전(經典)과 유학(儒學), 그밖의 제도들이 시작되었다. 일본 오사카부(大坂府) 기타가와치군(北河內郡) 히라카타(枚方)에 묘가 있으며, 그 아래에 사당을 세웠다.

王仁 : 百濟古爾王時博士官、精通奧義。五十二年乙巳、使於日本、冶工及釀造人吳服師等率往、傳習進千字文論語於應身天皇、經典儒學其他制度始。○墓在日本大坂府北河內郡枚方、其下建祠。

왜곡되고 과장된 이병연의 기록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이병연은 과감하게 왕인이 영암 서쪽 20리에 위치한 성기동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성기동 유래를 도선 국사가 태어난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봐도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이다. 이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고이왕 때인 을사년(서기 285년)에 일본에 가면서 야공, 양조인, 오복사를 거느리고 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또한 이병연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과장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왕인이 천자문 1권과 논어 10권을 가지고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병연은 일본서기나 고사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쓴 책 내용을 취합하여 이것저것 막 뒤섞여 과장해놓았다. 이병연의 영암 왕인에 쓴 기사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한편 조선 후기 실학자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를 보면 백제인들이 왜(倭)에 선진문물을 전해주는 과정과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고구려 담징 이야기도 나온다. 이유원은 순조 14년(1814)에 태어나 고종 25년(1888)까지 살았던 조선 후기 사람이다. 『임하필기』는 대학(大學), 맹자(孟子)와 같은 경서(經) 74종을 비롯하여, 사(史), 자(子), 집(集) 등 총 662종이 넘는 서적을 참고하여 완성되었다. 이는 중국의 서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의 서적을 모두 아우른 것이다. 이유원은 이 서적들을 참고하여 단순히 지식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가 습득한 지식을 정비하여 재탄생시키는 방식으로 『임하필기』를 저술하였다.

이유원(李裕元) 『임하필기(林下筆記)』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화한삼재도회》에 이르기를, “한 성제(漢成帝) 하평(河平) 2년(기원전 27), 왜(倭) 수인(垂仁) 3년에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도공 행기보살(行基菩薩)이란 자가 수행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배감(坏坩 기와를 굽는 가마)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태시(太始) 7년(271), 왜 응신(應神) 2년에 백제 왕이 진손(辰孫)을 보내어 일본에 들어가 태자사(太子師)가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서적(書籍)을 전해 주어 유풍(儒風)이 일어났다.” 하였고, 《화한삼재도회》에 이르기를, “진(晉)나라 태강(太康) 5년(284), 왜 응신 15년에 백제 사신 왕인(王仁)이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오니, 이에 유교(儒敎)가 처음으로 행해졌다.” 하였다. 

물부무경(物部茂卿)이 말하기를, “선정(先正) 중에 큰 공덕이 있는 분으로는 왕인씨(王仁氏), 황비씨(黃備氏), 관원씨(管原氏), 성와씨(惺窩氏) 네 군자(君子)이다.” 하였다. 

양(梁)나라 승성(承聖) 원년(552), 왜 흠명(欽明) 13년에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사신을 보내어 석가상(釋迦像)과 《번개경론(幡蓋經論)》을 바쳤다. 소아마자(蘇我馬子), 사마달(司馬達) 등이 모두 불도(佛道)를 숭상하니, 이것이 불교 사원의 시작이다. 또 오경박사(五經博士),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曆博士) 등을 보내왔다. 

《일본기(日本記)》에 이르기를, “진 후주(陳後主) 지덕(至德) 원년(583), 왜 민달(敏達) 12년에 백제 사신 일라(日羅)가 제갈량(諸葛亮) 병법 64진(陣)을 성덕태자(聖德太子)에게 전해 주었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에 이르기를, “수 문제(隋文帝) 인수(仁壽) 원년(601), 왜 추고(推古) 9년에 백제 중 관륵(觀勒)이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본(曆本), 둔갑(遁甲), 방술서(方術書)를 바치니, 왕진(王陳)은 역법을 익히고, 고총(高聰)은 천문 및 둔갑을 배우며, 산석(山昔)과 신일(臣日)은 아울러 방술을 배웠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양제(煬帝)의 연호) 6년(610), 왜 추고 18년에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왔는데, 담징은 오경(五經)에 정통하고 단청(丹靑)에 솜씨가 있었으며, 또 종이와 먹 및 맷돌을 만들 줄 알았으니, 이것이 종이와 맷돌을 만든 시작이다. 수 대업 8년(612)에 백제 미마지(味摩之)가 동부진야신(童部眞野臣)의 제자인 신한(新漢)과 제문(齊文)에게 음악을 가르쳐서 두 사람이 그 음악을 전수받았다. 

또 이해에 백제국에서 온 번(煩)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에 걸려 그 몸이 추하였지만, 긴 다리를 놓는 솜씨가 있어 180개의 다리를 만드니 오가는 도로가 비로소 소통되었다.” 하였다. 

《일본실기(日本實記)》에 이르기를, “백제에서 온 하성(河成)이 인물과 초목을 잘 그렸는데, 뒤에 그림을 공부하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서 법을 취하였다. 추고(推古) 때에 고려의 사문(沙門) 혜자(慧慈)가 태자사(太子師)가 되어 큰 공로가 있었는바, 백공(百工)이 혜자를 조사(祖師)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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