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대암에서 내려다본 구림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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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은 한나라 유방의 후손(?)

왕인에 대한 기사가 일본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정사 중 하나인 <속일본기>에 왕인의 출생가문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속일본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인 797년에 간무 덴노의 명으로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의 편찬이 각각 달리 진행되었다. 한국사의 통일신라와 발해 시대(남북국시대)와 겹치는 시기를 다룬 사서인데, 일본서기가 백제나 가야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면, 속일본기는 동시대에 존재한 통일신라 및 발해가 일본과 관련된 내용이 제법 수록되어 있다. 발해가 자체 역사서를 남기지 못한 관계로 발해사 연구에 꼭 필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속일본기》에는 왕인이 한나라 유방의 후손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왕인의 자손이라는 좌대사(左大史) · 정6위상(上) 후미노이미키 모오토(文忌寸最弟) 등이 자신들의 선조 왕인이 옛 한의 황제의 먼 후손이라고 간무 천황(桓武天皇)에게 주상한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시대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도 ‘왕인이 한(漢)나라 고제(高帝)의 말손(末孫)이다’라는 내용이 나오고, 실학자 이덕무가 쓴 <천장관전서>에도 ‘왕인은 본디 한 고제(漢高帝)의 후손이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일본 고서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왕인을 백제 본토인이 아닌 지금의 중국에 있었던 한나라 유방의 후손인 한족(漢族)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왕인이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서 왜(倭)로 건너갔었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고서에서 말하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 백제가 아닌 대륙 백제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보다 세밀하고 철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속일본기》와 왕인 

「모오토 등이 말하기를, 한 고제의 후손으로 앵(鸞)이란 자가 있었고, 앵의 후손인 왕구(王狗)가 백제로 옮겨갔는데,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때에 성조(聖朝)가 사신을 보내어 문인(文人)을 부르심으로 하여, 구소왕은 곧 왕구의 손자인 왕인을 바쳤다. 이는 후미(文), 무생(武生) 등의 시조이다. 이에 모오토 및 진상(眞象) 등 8인에게 스쿠네(宿祢)의 가바네(姓)을 주었다.

— 《속일본기》 엔랴쿠(延暦) 10년(791년) 4월 무술
(···) 最弟等言, 漢高帝之後曰鸞, 鸞之後王狗轉至百濟, 百濟久素王時, 聖朝遣使徴召文人, 久素王即以狗孫王仁貢焉. 是文, 武生等之祖也. 於是最弟及眞象等八人賜姓宿祢.」

여기서 말하는 한 고제는 초한지에 나오는 한나라 유방을 말하는데, 유방의 자손으로 「앵(鸞)」이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의 자손 「왕구(王狗)」가 백제로 건너와 살았으며 그 손자인 왕인이 왜(倭)로 도래하여 후미 씨(文氏)와 무생 씨(武生氏) 등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왕인은 백제에 망명한 중국계 학자이자 한족(漢族)이 된다.

한편, 《속일본기》 기사에 나오는 백제의 구소왕(久素王)은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諱)은 수(須)라고도 한다. 백제의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왕비 진씨(眞氏)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구수왕(近仇首王)은 태자로 있으면서 369년(근초고왕 24)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雉壤)을 침공해오자 왕의 명령을 받아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이병도를 비롯하여 그들을 추종하는 남한의 강단사학자들이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기사를 근거로 줄기차게 주장해온 ‘근초고왕이 369년에 경상도 신라와 가야를 점령하고 전라도 남부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마침내 마한을 복속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우리나라 사서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이러한 조작 내용이 버젓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한치윤(1765년~ 1814년) <해동역사>와 왕인

왕인은 백제국 사람인데, 본디는 한(漢)나라 고제(高帝)의 말손(末孫)이다. 고제의 후손 가운데에 난(鸞)이란 사람이 있으며, 난의 후손 가운데에 왕구(王狗)란 사람이 있고, 왕구의 후손이 왕인이다. 왕인은 여러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또 사람들의 관상(觀相)을 살필 줄 알았다. 응신천황(應神天皇) 15년에 백제의 구소왕(久素王) -살펴보건대, 구수왕(仇首王)의 잘못이다.- 이 아직기(阿直岐)를 파견하였다. 당시에 아직기는 능히 경전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황자(皇子)인 토도아랑자(菟道雅郞子)가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응신천황이 아직기에게 묻기를, “너보다 더 뛰어난 박사(博士)가 있는가?” 하니, 아직기가 대답하기를,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저보다 더 뛰어납니다.” 하였다. 천황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왕인을 불러오게 하였다. 다음 해 2월에 왕인이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와서 조회하였다. 왕인이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황자인 토도아랑자에게 가르치니, 황자가 왕인을 스승으로 삼아서 여러 전적(典籍)을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유교(儒敎)가 비로소 본조(本朝)에서 행해졌다. 왕인이 또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읊고 인덕천황(仁德天皇)의 보조(寶祚)를 축원하였으므로 그를 가부(歌父)라고 불렀다. 왕인이 죽자 우두천황(牛頭天皇)과 합제(合祭)하였다. 왕인은 서수(書首) 등의 시조(始祖)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이덕무(1741~1793) <천장관전서>와 왕인

왕인(王仁) : 응신왜황(應神倭皇) 15년(215)에 백제 사람인 아직기(阿直岐)가 《역경(易經)》ㆍ《효경(孝經)》ㆍ《산해경(山海經)》을 바치니, 황자(皇子) 토도치(菟道稚)가 사사(師事)하였다. 아직기가 또 박사(博士) 왕인(王仁)을 추천하니, 응신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청하였다. 구소왕(久素王)이 보내라고 명하매, 왕인이 천가문(千家文)을 가지고 이르니, 토도치가 또 사사하여, 유교(儒敎)가 비로소 행해졌다. 왕인은 본디 한 고제(漢高帝)의 후손이다. 한 고제의 후손에 난(鸞)이라는 사람이 있고, 난의 후손에 왕구(王拘)가 있고, 구의 손자가 인(仁)이다. 왕인은 또 난파황자(難波皇子)의 스승이 되었고, 난파진가(難波津歌)와 인덕보조송(仁德寶祚頌)을 지어 가부(歌父)로 일컬어졌다. 또 관상을 잘하여 대초료황자(大鷦鷯皇子)가 왜황(倭皇)이 될 것을 미리 알았다. 계체(繼體) 때에 백제의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 (段楊爾)ㆍ왕진이(王辰爾)ㆍ고안무(高安茂) 등이 와서 문학(文學)을 대강 설명하였다. 민달(敏達) 때에 고구려에서 보낸 사신이 까마귀의 깃에 쓴 글을 가져왔으므로 뭇 신하들이 읽지 못하였는데, 왕진이가 햇빛에 비추어 읽었다. 대개 까마귀의 깃을 밥의 김에 쪄서 깁으로 깃을 누르면 그 글자가 죄다 박히는 것이다.

王仁 : 應神倭皇十五年。百濟人阿直歧。進易經。孝經。山海經。皇子菟道雅。師事之。阿直歧又薦博士王仁。應神遣使請之。久素王命送。王仁。持千家文而至。道雅。又師之。儒敎始行。仁本漢高帝之後。有曰鸞鸞之後。有曰王狗狗之孫。爲仁。又爲難波皇子之師。作難波津歌。仁德寶祚頌。號曰歌父。又能察人相。預知大鷦鷯皇子之將爲倭皇。 繼體時。百濟五經博士。段楊爾。王辰爾。高安茂等。來揚榷文學。敏達時。高句麗遣使。有鳥羽之書。羣臣莫能讀。王辰爾。照以日光讀之。葢烝鳥羽於飯氣。以帛印羽。則悉搨其字。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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