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마을과 왕인 -1

중국의 사서와 발굴된 유물이 말해주는 우리 민족인 ‘동이’의 고대 활동무대 –마한을 비롯한 삼한의 역사도,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역사도, 신라와 발해와 고려의 역사도,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도 저 강역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선시대 모화사상에 빠져 고대사를 왜곡하여 우리 선조들이 경영했던 광활한 대륙의 영토를 한반도로 축소했던 유학자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식민사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따랐던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왜곡된 교과서를 통해 우리에게 강요해온 편협하고 축소된 반도사관에서 탈출해야 한다. 인공위성과 컴퓨터로 대표되는 최첨단 디지털 스마트 문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제 우리는 저들이 쳐놓은 사악한 식민사관, 반도사관의 덫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맹(史盲)에서 벗어나 광명천지를 봐야 한다. 다양한 사서와 고지도를 통해 세밀하고 철저하게 교차 검증하여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 강탈당한 우리의 얼과 넋을 되찾고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이제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 ‘역사의병’이 되어야 한다.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현재 영암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 왜곡부터 바로잡아 나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진실의 토대 위에 그려진 역사와 문화만이 감동을 주고 울림을 주고 영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 거짓과 조작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역사는 겉만 화려할 뿐 비웃음의 대상이고 사상누각일 뿐이다.

구림 명칭은 도선국사 탄생설화가 시초

구림은 영암을 대표하는 여러 역사·문화마을 중 하나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문화유적과 유물을 품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구림의 지형과 역사, 인물과 풍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이화(朴履和)가 쓴 가사인 「낭호신사」를 꼭 읽어봐야 한다. 박이화[1739~1783]는 함양인으로 호는 구계(龜溪)이다. 내용에 따르면 구림의 옛 이름은 쌍와촌(雙蛙村)이었고 돌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도선국사 탄생설화와 관련한 비둘기가 등장하여 후에 구림(鳩林)이라고 이름 지었다. 「낭호신사」에는 구림마을의 지명유래를 비롯하여 열 두 동네의 이름과 여러 정자 이름, 구림에 터를 잡은 성씨들까지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재 영암이 그렇게 내세우는 ‘왕인’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도선’에 대한 이야기는 첫 부분부터 반복해서 여러 차례 나온다. 이 글이 써진 때는 1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는데 구림마을에 왕인박사와 관련된 시문이나 기록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로부터 약 150년 후인 1930년대 전후로 갑자기 ‘왕인’이라는 이름이 구림마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응신 16년(서기 285년)에 왜(倭)의 장수 황전별이 백제에 와서 왕인박사를 데리고 갔다고 했으니 무려 1,700년만에 구림마을에 없던 이름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일본인 승려 아오키 게이쇼(靑木惠昇)가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이 내선일체 선전용으로 왕인박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시류에 편승하여 영암에 왕인 동상을 세운다고 난리를 떨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왕인박사체험마을’로 변질된 구림마을

그로부터 일백 년이 지난 2023년 현재 구림마을은 ‘왕인박사체험마을’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일본에게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선진문명을 선도했다는 취지로 도선국사 탄생지를 점령하여 왕인사당과 왕인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구림마을의 선비정신과 공동체 정신을 대표하는 마을 서당인 문산재가 왕인박사 수학처로 둔갑되었으며, 불교 유물인 미륵불(문수상)까지 왕인석상으로 변질되었다. 1973년부터 지금까지 50년에 걸쳐 왕인박사 현창사업이 진행되었고 본래 구림마을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이름까지도 바꾸고 있는 지금 도대체 왕인은 누구이고 영암과는 어떤 연고가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구림마을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설 수 없게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왕인이 백제 사람이 아니라 마한 사람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렇다면 왕인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일본으로 갔는가? 
구림마을과 왕인, 백제와 왕인, 마한과 백제, 백제와 왜(倭), 삼한의 뿌리와 강역, 삼국의 태동과 강역, 영산강 세력과 대륙 등등 궁금한 점이 참 많다.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다.

역사는 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역사는 더 이상 역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식민사학자들)을 버려야 우리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순진하게도 그동안 조작 날조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수십 년 동안 사실로 인식하며 비참할 정도로 많이 속고 살아왔다. 모화사상에 빠져 주체성을 잃어버렸던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한 고대 삼한의 역사를 그대로 추종하고 계승해오고 있는 강단사학자들, 어떤 이유에서든 목적을 위해 과정을 왜곡해온 현대의 정치가들, 그리고 그에 편승하여 부화뇌동한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바로 그 주범이다. 그들은 교활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속여왔다. 일제 식민지에서 독립한 지 78년이 되었건만 우리의 얼과 넋을 아직 되찾지 못하고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준 틀에서 방황하고 있다.

‘역사의병’이 필요한 때

우리는 디지털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역사는 자칭 역사가들, 역사학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별생각 없이 사실로 믿고 달달 외웠다. 한문으로 기록된 고서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었고 넘을 수 없는 절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디지털 스마트 혁명으로 각 개인은 호주머니 속에 전자 도서관을 넣고 다니는 시대가 도래했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던 한문 고서들을 일반인들도 원문과 번역본을 함께 열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의 사서와 중국의 사서 원문을 비교 검증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인공위성의 발달과 교통 통신의 발달로 이웃 나라의 지형과 지명을 간단하게 검색해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박물관이나 도서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각 나라의 고지도도 간단하게 검색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우리는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비좁고 편협한 ‘반도사관’에서 벗어나 옛 선조들이 놀던 대륙과 해양으로 역사의 지평을 넓히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모두 ‘역사독립군’이 되어야 한다. ‘역사의병’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속한 생활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과 동시에 우리의 정신과 사고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역사의병, 향토사학자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 영암을 살리는 일이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기 위한 시대적 사명이자 책무라고 믿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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