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83]
■ 도갑리1구 죽정마을(27)-문산재 문수상(文殊像)(1)

 

문수상 전경  / 문산재에서 월대암 방향으로 약 50m 올라가면 한 기의 석불입상을 만날 수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미륵불을 문수상이라고 부른다. 원래 문수암이 있었던 곳이니 암자 뒤편에 문수보살상을 조성해 놓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 문수상은 서쪽 바다(서호)를 바라보고 있는데, 월출산 용암사 뒤편에 서해를 바라보는 마애여래좌상을 조성해 놓은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문수상 전경  / 문산재에서 월대암 방향으로 약 50m 올라가면 한 기의 석불입상을 만날 수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미륵불을 문수상이라고 부른다. 원래 문수암이 있었던 곳이니 암자 뒤편에 문수보살상을 조성해 놓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 문수상은 서쪽 바다(서호)를 바라보고 있는데, 월출산 용암사 뒤편에 서해를 바라보는 마애여래좌상을 조성해 놓은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현재의 문산재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차례의 변천 과정을 겪었다. 문산재의 모태는 1657년(효종 8년) 창녕인 태호공 조행립(1580~1663)이 성기동에 설립했던 성기서숙(聖起書塾)으로부터 출발한다. 태호공 셋째 아들인 안용당 조경찬(1610~1678) 부친의 뜻을 받들어 성기서재를 지극정성으로 관리하고 운영했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정황상 강당을 이건할 필요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죽정마을 20호에 소개했던 최필흥이 쓴 강당 상량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연주인 죽림공 현징을 중심으로 동리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갑자년(1684)에 월대암 아래의 문수암 터로 강당을 이건하였다. 이때부터 문수서재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문수서재는 다시 문산재로 불리다가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과 부침을 겪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 

문수사를 읊은 남호처사 구암공 임호(林浩)의 시

지남들을 간척한 월당공 임구령 광주목사의 장남인 구암공 임호(1522~1592)는 어느 해 봄에 문수사에 올라 아래와 같은 한 편의 시를 남겼다. 
 
문수사 아래 시냇가에서 이척장의 시에 
차운하며
시냇가 반석은 스스로 편편한데
북쪽으로 보이는 산들 눈 아래 들어오네
해 저물녘 봄빛 가득 읊조리며 돌아오니
기우제 지낸 천년 자취가 바로 나의 스승
일세

文殊寺下溪邊 次李戚長
溪邊盤石自平夷 北望群山眼底卑
日暮咏歸春色滿 舞雩千載是吾師
(출처: 남호처사 구암공 임호 유고집 제1권15쪽)

임호의 시에서 두 번 째 구절(북망군산안저비-북쪽으로 보이는 산들 눈 아래 들어오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문수사라는 절이 높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구암공 임호가 구림마을 서호에 살면서 박규정 등 여러 선비들과 대동계를 기획하고 회사정을 지어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고 마을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던 시기는 조선 중기 명종과 선조가 왕위에 있었을 때다. 그의 생몰연대를 따져봤을 때 1550년에서 1590년까지 약 40년 동안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문수사를 읊은 위의 시도 이 시기 동안에 작성되었다고 믿어지는데 그렇다면 월대암 아래의 문수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건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임호는 문수사 외에도 월출산에 있는 암자와 사찰을 자주 방문하여 스님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남긴 인물이다. 구암공 유고집에 등장하는 시를 보면, 상견성암, 하견성암, 용암사, 녹거사, 도갑사, 문수사 등 여러 편의 사찰 이름이 나온다.

숭유억불의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선비들이 인근 사찰이나 암자에 들러 유숙을 하고 스님들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류한 사실을 보면 당대 사람들의 사고의 폭과 여유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었던 것 같다. 

한편 마을 주민들이 미륵불, 문수보살상, 문수상 등으로 불러왔던 석불입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영암군청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디지털영암문화대전’에 나와 있는 문산재 석불입상을 검색해 보았다. 여기에는 ‘도갑리 왕인 석상’이라는 제목으로 설명을 해놓았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원문을 그대로 발췌하여 싣는다.

‘디지털영암문화대전’에 설명된 문수상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 주지봉 중턱에 있는 석조 입상.

[개설] 도갑리 왕인 석상(道岬里 王人 石像)이 세워진 곳은 신라 말 도선 국사(道詵國師)의 행적이 전해지는 곳이며 백제 왕인 박사가 공부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도갑사에서 주지봉을 향해 올라가는 문산재(文山齋) 위쪽 약 20m 거리에 있다. 왕인 석상은 마을에서 각각 ‘문수암’과 ‘문수상’으로 구전되어 왔다. 도선 국사는 신라 말 풍수지리와 비보 사상을 불교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한 영암 출신의 승려이다. 현재의 문산재와 양사재(養士齋)는 1986년경 왕인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고 이때 불상은 도갑리 왕인 석상으로 명명되었다.

[형태] 도갑리 왕인 석상은 불보살의 법의를 입고 양손을 소매에 넣어 배 앞으로 가져온 입상이다. 세워져 있는 직사각형 돌에서 두드러지게 조각되었다. 세부 표현을 위한 선각들이 또렷하며 묵직한 양감이 느껴진다. 귀는 자연스럽게 길고 눈동자가 표현되고 눈썹에서 이어진 코와 두툼한 입술을 수평으로 다문 모습 등에서 출중한 인물을 조각하려는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머리 정상부 표현 등에서 불교 도상(圖像)의 특징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양손은 넓은 소매 안에 넣어 유교식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발은 바닥 돌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신체와 결구되도록 하였다. 그 앞에 작은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주변에는 큰 바위가 있으며 그 사이로 책굴(冊窟)로 부르는 길이 7m 규모의 천연 바위굴이 있다. 

[특징] 도갑리 왕인 석상은 불상 및 보살상과 유교식 인물 표현이 함께 표현된 모습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도갑리 왕인 석상은 양감과 세부 표현, 그리고 불교 도상과 유교 도상의 공존 등에서 고려 중기의 상으로 추정된다. 왕인 석상이라는 이름은 근래에 붙여졌고, 마을에서는 문수상으로 알려져 왔으며 도선 국사 관련한 이야기 역시 전해지는 곳이므로 보다 더 명확한 해석이 필요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뒤죽박죽이 된 석불입상

‘디지털영암문화대전’에 나온 설명을 보면 과거 수백 년 동안 문수암 ‘문수상’으로 구전되어 왔던 석불입상이 1986년 문산재 건물을 복원하면서 갑자기 ‘왕인 석상’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문수암을 건립한 이도 도선국사라는 이야기인데 갑자기 1980년대 들어서면서 문수암과 도선국사 관련한 이야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느닷없이 왕인박사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실체를 밝혀줄 역사적 사료는 물론 없다. 심지어 마을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온 설화나 전설이나 민담 역시 없다. 

문수상 곁에 있는 자연 동굴 역시 마을 주민들은 ‘베틀굴’로 불러왔는데 갑자기 왕인박사가 책을 쌓아놓고 공부했던 ‘책굴’로 명명되었다. 물론 근거는 없다. 이것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 호에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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