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82]
■ 도갑리1구 죽정마을(26)

죽정마을의 봄  / 죽정마을에 벚꽃이 한창이다. 사진 중앙에 문산재 월대암이 바라보인다. 
죽정마을의 봄  / 죽정마을에 벚꽃이 한창이다. 사진 중앙에 문산재 월대암이 바라보인다. 

삼월 단상 - 꽃이 피어야 비로소 봄이 온다

삼월은 봄의 문턱이다. 마당 주변에 심어놓은 봄꽃나무마다 꽃망울이 맺히더니 마침내 순서대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매화꽃이 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매화 봉오리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것들이 필 듯 필 듯하면서 그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선뜻 꽃봉오리를 펼치지 않더니 경칩이 지나자 기어코 청아한 속살을 내보였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매화 향기가 실려 와 코끝이 향기롭다.

매화는 추운 겨울을 지내야만 향기가 맑고 속되지 않은 법이다. 매섭고 차가운 겨울바람과 폭설을 견디면서도 열악한 환경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그 추위와 한기를 안으로 수렴하여 간직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스스로 꽃 문을 열어 봄을 부른다. 매화꽃은 봄의 전령사다. 다시 말하면 매화 향기가 뜰에 가득 퍼지고 나서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것이다. 

매화꽃이 한창일 때, 살구꽃이 뒤를 이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소박하고 수더분한 얼굴의 살구꽃은 매화꽃에 비해 향기가 덜하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고 읊었던 이호우 시인의 말처럼 살구꽃은 정겨움의 꽃이다. 

살구꽃이 지고 나면 나도 질세라 벚꽃이 화려하게 등장한다. 예전에는 4월에 피는 꽃이었지만 요즘은 삼월 하순에 핀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수선화, 명자꽃 등이 벚꽃과 함께 봄 동산을 알록달록하게 수놓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봄에 대해서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봄이 오면 꽃이 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야 봄이 오는 것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이 하신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花扉自開 春風來(화비자개 춘풍래) [꽃문이 스스로 열려 봄바람을 부른다]”

아무리 봄비가 내리고 봄바람이 분다고 해도 꽃봉오리가 열리지 않으면 진정한 봄이 왔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초목들이 안으로 수렴하여 간직하고 있던 자신들만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경험해온 그 아름답고 화려한 봄은 오지 않는다. 꽃이 피지 않았는데 삼월이 되었으니 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온갖 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모든 꽃들도 제 이름을 부르며 꽃망울을 터뜨린다.”

인간 세상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인간 세상에 봄이 찾아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중에는 척박한 역사의 뜰에 봄의 꽃향기가 아름답게 피어오르기를 갈망하며 소중한 목숨까지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숭고한 노력으로 마침내 이 땅에는 온갖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할 수 있는 필요한 조건이 마련되었다. 20세기 동안 하늘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압제와 독재의 먹구름도 민중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이 맘만 먹으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고 어느 정당이나 단체에 참여하여 자신의 뜻과 신념을 펼칠 수 있는 시대다. 짧은 시기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봄비가 내리고 봄바람이 분다고 해서 무조건 봄이 오지는 않듯이, 압제와 독재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광풍이 누그러졌다고 해서 진정한 민주주의 가치가 실현되는 인간 역사의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나름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되어 과거의 암울했던 시기와는 많이 다른 상황인데도 이 땅에는 왜 아직도 이렇게도 불공정 부정부패와 부조리로 시끄러운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색깔과 향기를 발산하는 꽃문을 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따뜻한 봄바람과 봄비가 계속되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매서운 북풍한설을 이겨내고 각양각색의 꽃망울을 터뜨려 진정한 봄을 불러오는 저 봄꽃들처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닫힌 내면의 문을 활짝 열고 그동안 갈무리해두었던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는 꽃망울들을 일제히 터뜨려야 할 때다.

수백만, 수천만 개의 꽃봉오리들이 일제히 터뜨리는 형형색색의 색채와 맑은 향기들은 불공정 시비로 시끄러운 이 땅을 한순간에 아름다운 봄 동산으로 뒤바꿔놓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세상에는 봄바람이 불고 학수고대했던 봄이 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주변 환경을 탓하고, 남을 탓할 수는 없다. 내가 변하지 못하는 까닭을 언제까지 ‘조직’의 탓으로만 돌려서도 안 될 것이다.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꿨을 때, 주변 환경도,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수운 선생의 ‘꽃 문이 스스로 열려야 봄바람이 분다’라는 말씀의 뜻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이것은 좁게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는 일이고, 넓게는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해체하고 지방자치의 활성화를 꾀하는 일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은 바로 이 두 가지에 달려고 믿는다.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 마당 한구석에서 홀로 봄꽃 향기를 맡으며 생각한다. 올봄에는 이 땅의 민중들이 자기 안에 품고 있는 맑고 고귀한 품성을 인식하여 마침내 그 내면의 출입구에 남아있는 미움과 편견의 찌꺼기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형형색색의 꽃망울들을 터뜨려 주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날 이후, 매화 향기보다 더 맑고 깨끗한 향기가 넘쳐흐르는 이 봄 동산에서 온 이웃들이 지역과 지역을,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손에 손잡고 춤추는 시절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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