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8)
■ 도갑리1구 죽정마을(12)

도갑사에는 도갑사의 역사와 흥망성쇠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비가 두 개 있다. 도선국사비와 수미왕사비가 그것이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에 도갑사를 창건한 승려이고, 수미왕사는 조선 초에 도갑사를 중창한 승려다. 도갑사 경내를 둘러보다 보면 먼저 수미왕사비를 만나게 된다. 대웅보전 뒤 국사전 곁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수미왕사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도갑사 수미왕사비는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자취를 기록한 비이다. 경내 국사전 곁 다소 외진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비는 돌거북인 귀부와 비의 몸체, 그리고 용을 아로새긴 비의 머리 부분인 이수로 되어 있다. 돌거북의 머리는 눈살을 심하게 찌푸린 용의 얼굴로 표현되었으며, 목이 짧아 등 껍질이 꽤 두꺼워 보인다. 이수에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구름무늬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용 두 마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4m, 비신의 높이는 2m, 비신의 폭은 1.08m, 비신의 두께는 21cm이다.

비의 건립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만들기 시작하여 조선 인조 11년(1633)에 완공했다. 그 양식적 특징은 고려 전기에 유행하였던 형식과 비슷하다.

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화상(妙覺和尙) 비명(碑銘)

대저 바다가 크고 깊다고 일컬어지는 까닭은 맑고 더러움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이요, 도를 무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유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구든 그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도를 터득하여 부처님의 삼매 속에서 유희하면서 고통의 바다 속에서 반야의 배를 타고 중생을 구제한다면 이는 세상에 있어 가장 귀중한 존재이므로 대개 이러한 분은 매우 드문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 묘각왕사가 바로 그러한 분이다. 

스님의 휘는 수미이고 옛 낭주 출신이다. 최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꿈에 특이한 사람으로부터 구슬을 전해 받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였고, 태어날 때 특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명랑하여 세속을 멀리하려는 뜻을 품었다가 13살 때 낭주의 서쪽 월출산 도갑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20살 때 비구계를 받은 다음 지체없이 여러 강원(講院)을 다니면서 삼장(三藏)을 공부하였다. 속리산 법주사에 이르러 나이도 같고 이름도 같은 신미(信眉)라는 사미(沙彌) 스님을 만나 막역한 사이가 되어 서로 탁마하면서 대장경을 배우고 계율을 익혀서 자비한 얼굴과 도골(道骨)로서 눈의 광채는 별빛처럼 빛났고, 목소리는 낭랑하며 온화하고 말재주가 뛰어났다.

학자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여 두 감로문(甘露門 - 열반에 도달하는 문)이라고 일컬었다. 명성이 자자하여 점점 더욱 두각이 드러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동학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본분사(本分事-처음부터 부처와 중생이 하등의 차이도 없이 완전하게 동일한 모습이라는 이상적인 경지)를 등지고 있는 것은 마치 승요화상이 인물화를 잘 그려서 묘화(妙畫)라고 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고 같다”고 말하고, 드디어 배우던 학문을 던져버리고는 삿갓을 쓰며, 짚신을 신고 선방으로 출입하면서 참선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구곡각운 스님을 친견하였으나 뜻이 계합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등계존자인 벽계정심선사를 찾아갔으나 회명부새(晦冥否塞)한 불교 사태를 만나 선의 경지는 황폐하여 적막한 것이 마치 새벽하늘에 사라지는 별빛과 같이 희미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침 스님께서 선종판사에 선출되어 불교의 억압정책으로 말미암아 국이 터져 흐르는 물결을 막아 이미 기울어진 종단 운명의 물결을 일시나마 만회하였으니, 참으로 종문(宗門)의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스님은 곧 도갑사로 돌아왔으니, 이는 본사를 잊지 아니하였음을 보인 것이다. 도선국사가 비보 사찰로 지은 선사의 도장이 황폐하고 몰락하여 먼지 쌓인 우거진 풀밭이 된 현장을 보고 대중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 복구하지 아니하고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였다. 

더불어 성상께서 복구토록 하라는 하명이 있어서 묘작화상의 문도인 홍월스님으로 하여금 복구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불사를 마치고 보니 도량을 장엄한 모든 부분이 관철되었으므로 마치 강궐(絳闕)과 청도(淸都)가 공중으로부터 떨어진 것과 같이 일신되었다. 또 영웅대군이 단월(시주)가 되어 약사여래불상 3구를 제작하여 불전에 봉안하였는데, 때는 천순(天順) 기원 원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도들의 사사(四事) 공양이 다투어 들어오고, 육화(六和) 대중이 떼를 지어 운집하여 그 수효는 일천 명에 가까이 이르렀다. 용상대덕이 위요하여 종풍을 크게 진작하였다. 그 후 세조께서 예를 갖추고 스님을 영접하여 왕사로 책봉하고, 묘각왕사라는 호와 함께 자색 가사 한 벌을 올렸다.

그 후 왕은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문하였고, 상모 불자와 유리 염주도 선사하였다. 고관대작의 부인들과 공경(公卿), 묵수(墨綬), 동부(同符)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서쪽을 향하고 꿇어앉아 법을 묻고 북쪽을 향하여 예배한 것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으니, 당시에 왕과 신하, 사부대중의 존경을 한몸에 지녔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종문(宗門)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하여 최후 유촉한 다음 조용히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63세요, 법랍은 51하(夏)였다. 절의 동쪽 기슭에 탑을 세우고 함께 기적비를 세웠으나 이미 글자가 거의 마멸되어 제대로 판독할 수가 없었다. 당시 주지인 청신화상이 다시 비를 세워 오래도록 썩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하여 그 사실을 적어 나를 찾아와 비명을 청탁하므로 영원히 새겨 이르노라. 

명(銘)에 이르기를, ‘하늘처럼 높고 높은 월출산이여 남쪽으로 뻗어가서 남해를 진압하니, 그 정기는 뛰어나신 영재를 낳고 특이하게 태어나신 도선국사여! 비보사찰 창건주인 도선국사는 국민들의 정신지주 국사로 추대하고, 중창주인 수미대사를 왕사로 책봉하니 세조대왕 묘각이라 호를 받치네. 구산선풍 쇠퇴하여 불이 꺼지니 임제선풍 사라진 후 왕사가 중흥하네. 세월따라 그 선풍이 흥폐를 거듭하니 종과 북을 크게 쳐서 진작하였네. 첫 번째로 남긴 분도 묘각국사요, 두 번째로 전해 줌도 묘각이니 수미이시네. 영원토록 이 스님을 잊지 않으려면 지극정성으로 돌에 새겨 전시함이 제일일세.’

숭정 기사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계유년 6월 일에 비를 세우고, 해동사문 백암 성총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전액까지 쓰다.(출처-영암의 금석문/영암문화원)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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