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5)
■ 도갑리1구 죽정마을(9)

월출산 도갑사 상견성암/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마당 앞 바위에는 구한말, 영암 하씨 문중에서 새겼다는 '천봉용수(千峰龍秀) 만령쟁호(萬嶺爭虎)' 글귀가 남아 있다. ‘천 개의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는 용과 같고, 만 개의 계곡은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듯하다’는 뜻이다.
월출산 도갑사 상견성암/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마당 앞 바위에는 구한말, 영암 하씨 문중에서 새겼다는 '천봉용수(千峰龍秀) 만령쟁호(萬嶺爭虎)' 글귀가 남아 있다. ‘천 개의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는 용과 같고, 만 개의 계곡은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듯하다’는 뜻이다.

상견성암

도갑사는 신라 헌강왕 8년(880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본래 12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견성암과 동암 두 곳만 남아 있다. 이번에 답사할 곳은 바로 이 도갑사 상견성암이다. 사실, 구정봉 아래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용암사지에서 노적봉 밑에 위치한 상견성암까지 통하는 좁은 샛길이 있다. 하지만, 용암사가 폐사된 후로 발길이 뜸해져서 여름에는 온갖 잡목과 풀이 우거져서 접근하기가 힘들다. 현재 상견성암으로 향하는 가장 일반적인 길은 도갑사 대웅전을 지나 홍계골을 오른편에 끼고 억새밭 방향으로 잠시 가다가 왼쪽 대나무 숲길로 접어드는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견성암 가는 길이 일반인들에게는 통제되고 있다.

견성암(見性庵)은 원래 하견성암, 중견성암, 상견성암 셋으로 구분되어 있던 암자인데 하견성암과 중견성암은 폐허로 변한 지 오래고,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상견성암만 남아서 선승들의 수도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대에 와서 청화스님이 1978년부터 3년 동안 묵언을 하며 수도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중기 때까지만 해도 여러 스님들이 주석하면서 수도했던 곳인데 지금은 오직 한 분의 스님만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고 계신다.

남유록에 묘사된 상견성암

1722년 담헌 이하곤은 호남 지방을 여행하고 ‘남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 기행문에 보면 상견성암에 대한 당시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상견성암을 금강산의 암자 영원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

"용암사로부터 갔던 길을 되돌아서 아래로 율령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꺾어 몇 리를 걸어가서 백 길이나 될 듯한 절벽에 나 있는 실 같은 길로 빙 돌아가는데, 지극히 위험스러워 무서웠다. 무성하게 난 대나무가 촘촘히 우거져 제멋대로 이리 가로 막고 저리 뚫려 더 갈 수가 없었다. 상견성암에 이르니 뒤편에 석봉이 있는데 식규암과 같다. 서쪽에 큰 돌이 깎아 세운 듯 대를 이루고 있으며 노목 몇 그루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돌 위에 퍼져있다. 돌 위에 신보가 먼저 올라갔다. 노승 3~4인이 차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나무뿌리에서 올려다보니 거의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방이 또한 지극히 밝고 정갈하며, 햇빛이 기름종이로 바른 창에 비쳐 사방 벽으로 돌아가니 흰 눈으로 이루어진 마을 안과 같다. 부들로 만든 자리, 선탑(禪榻), 향로, 경권 등 여러 가지 놓여 있어 그윽하고 맑다. 내가 남쪽으로 와서 이름난 암자를 관람하며 들려본 곳이 수십 곳이나 이곳이 당연히 제일이다. 비록, 금강산 가운데에 갖다 놓는다고 해도 결코 영원암(금강산 명경대 근처에 있는 암자)의 진불(眞佛)만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혜정스님은 사람됨이 조용하며 맑고 조심하며 주의함이 있는 것 같다. 나이는 80인데, 용모는 60세쯤 돼 보인다. 향산(香山)으로부터 바야흐로 여러 스님들과 참선하는 중이다. 시 한 수를 남기고 돌아오다가 대적(大寂), 죽전(竹田), 두 암자에 들렸다가 도갑사에 돌아오니 한낮이 되었다.“
한편, 도갑사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에는 상견성암에 대해서 이렇게 써놓고 있다.

"비경(秘境), 그리고 신비, 신선의 자리

한 번이라도 견성암을 다녀간 경험이 있는 불자나 관광객들은 그 풍광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은은한 달밤에 빛나는 산의 정취, 새벽녘 상서로운 하늘... 그것은 견성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비, 바로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열사흗날 달밤에 친견한 견성암

필자도 "음력 열사흗날에 견성암 앞뜰에 서서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달을 보지 않고서는 월출산 달을 말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어서 그날을 기다렸다가 야간 산행을 한 적이 있다. 견성암으로 오르는 길은 일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도갑사 해탈문과 대웅전을 지나 조금만 숲길로 들어서면 맑은 시냇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홍계골과 용수폭포가 나온다. 이 시냇물을 건너면 바로 왼편에 미륵전이 보이고 앞에는 부도전과 도선국사비가 나온다. 미왕재 억새밭 가는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왼쪽으로 무성한 왕대 숲이 자리하고 있다. 상견성암 가는 길은 바로 이 대숲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숲 속에 야생 차나무가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른바 죽로차인 셈이다. 청명한 가을 열사흗날 달 밝은 밤, 댓잎에 부서지는 달빛을 받으며 이 죽로차 밭을 지나노라면 이미 암자에 도착하기 전에 속세를 떠나있게 된다. 하얀 차 꽃은 달빛을 받아 더욱 희고, 좌선삼매에 든 선승처럼 꼿꼿이 서 있는 조선 대나무들은 소슬바람에 흔들거리며 소살소살 서걱거린다. 대숲을 빠져 나와 동백나무와 단풍나무가 우거진 샛길을 한 참 올라가면 폐허가 된 하견성암 터와 중견성암 터가 나온다. 길가에는 옛 스님들이 사용했던 맷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 쓸쓸함을 더해준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노적봉 아래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기와집이 한 채 보인다. 바로 상견성암이다.

암자 주위는 노적봉, 전함바위, 합장바위, 수미산을 업고 있는 코끼리바위 등 기이한 바위로 가득하다. 가히 절경 중의 절경이다. 

암자 마당 앞 바위에는 구한말, 영암 하씨 문중에서 새겼다는 글귀가 남아 있다. ‘천봉용수(千峰龍秀) 만령쟁호(萬嶺爭虎)’(천 개의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는 용과 같고, 만 개의 계곡은 호랑이가 서로 다투는 듯하다)

이곳 견성암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첩첩이 쌓인 산등성이 너머로 멀리 두륜산이 보인다. 동다송과 다신전을 저술하여 한국의 다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선사가 완호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대둔사와 40년 동안 주석한 일지암이 있는 곳이다. 틀림없이 초의선사도 도갑사에 머무르면서 이 견성암에 자주 들렀으리라. 어쩌면 둥근 달이 안온하게 세상을 품어 내놓던 날, 이곳에서 두륜산까지 꿈결처럼 펼쳐진 산너울을 바라보다 나중에 자신이 거처할 곳을 은연중에 정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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