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4)
■ 도갑리1구 죽정마을(7)

도갑사에 이르는 관문, 해탈문. 2007. 8. 30 도갑사 대웅보전 건립 중인 모습
도갑사에 이르는 관문, 해탈문. 2007. 8. 30 도갑사 대웅보전 건립 중인 모습

수남사기(水南寺記)

월출산은 실로 신라 말에 명승 도선국사가 주석한 곳이다. 도선 공이 처음으로 그 산의 정맥에 대가람을 세워 바로 소위 도갑사라 하였다. 또한 산이 내외로 둘러 있고 절간이 백여 채가 바위 골의 숲 줄기에 이어 속세로부터 은둔하여 살고자 하는 이들이 가히 미혹할 만한 곳으로 끼쳐왔었다. 비록 세월은 오래되어 자취도 없이 황폐하고 무너졌으나 지금 있는 것은 능히 그 십 분의 일도 못 되며 옛터에 유적만 남아 있으니 보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가히 또렷이 찾아볼 수 있다.

도갑 남쪽 산골의 계곡물을 쫓아가자면 위쪽에 한 구역이 있으니 냇물을 끼고 봉우리를 돌면 지세가 약간 높고 막힌 곳에 그 형상이 가히 전에 있던 절간과 모양은 비슷하게 있으나 잡초가 무성하게 덮여 텅 비어있어 말을 할 수 없다. 숭정 병신년(1656)(중국 명나라 의종의 연호가 숭정인 바 을유년(1645)에 청나라에 망하였으나 조선의 선비들이 청을 배격하여 숭정 연호를 계속 사용함)에 이르러 승려(僧侶) 석민(釋敏)이 살펴서 기술하고 전대(前代) 일을 개탄하여 이제야 낭떠러지까지 가시덩굴을 베어내고 한두 사람의 동지들을 불러 돈이나 재물을 걷어 모아 법당과 요사(僚舍)를 지어 일의 준공을 알렸으며 또한 그전에 있었던 여러 칸의 루(樓)를 지어 내려다보기에 편하게 내려다볼 수 있게 하였으니 그 규모와 제도는 비록 적지만 엄연한 지원(祗園)이였으니 대범(大汎) 도선공(道詵公)으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해가 거의 천여 년에 가깝다. 그간에 유람한 사람들과 부처님의 불자들이 이곳을 지나간 이가 또한 많았으니 석민선사가 하루아침에 하늘이 아껴두고 귀신이 비물(秘物)로 한 이곳에 비로소 지을 때는 어찌 이 같은 사람들을 기대하였겠는가? 이곳에 은현(隱顯:숨었다 나타났다 함)이 때가 있어 가히 석민선사의 법안(法眼)으로 보는 눈이 있었다 하겠다. 

내가 남쪽 월출산 밑으로 귀양을 가 있을 때 손들과 함께 절에 이르러 루에 올라 상영(觴詠:술을 마시면서 시가를 읊음)을 하면서 바라보니 그 고요하고 그윽한 경치가 산뜻하고 깨끗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운 뜻이 꿈같게 하니 석민이 개척하여 우리에게 이 즐거움을 얻게 한 힘이었다. 나 또한 석민선사가 뒷사람들에게 그 부지런함과 그 지혜로움을 알게 계획한 뜻을 가상하게 여겼으니 그때 석민선사는 이미 생사의 고계(苦界:괴로운 인간세계)를 벗어나 열반에 든 뒤였으므로 옥열(玉烈)이라는 노승이 자못 문자를 알아 편안하고 고요하게 나에게 석민선사의 일을 자상하게 말하므로 내 비록 석민선사는 보지 못하였으나 이 절의 창시(創始)를 생각할 때 그 위인 됨을 대강 알만하였고 옥열의 말에 의하여 그 잊지 못할 말을 들은 연후에는 석민선사가 비범한 승려임을 믿게 되었다. 

절은 오래되었으나 이름이 없어 남역(南域)의 도갑을 남암(南菴)이라 부르나 내가 이름을 고쳐 수남(水南)이라 명하였으며 그 루(樓)를 산취루(山聚樓)라 하였으니 루(樓)가 사면의 산이 다 푸르르게 항상 둘러 있어 실로 그 뜻이 합당한 지경이다. 옥열이 나에게 한마디 말을 청하므로 이곳의 사실을 기술하나 불행하게도 도선공이 입적한 지 천 백 년이나 오래되었으나 다행이 석민선사(釋敏禪師)를 만나 천 백 년 후에 개척한 업(業)을 얻었으니 기이하다 하겠으며 나 같은 사람이 놀러 온 것이 석민선사가 또한 입적하여 있지는 않고 개척이 있는 뒤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지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이 같은 사실을 기술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아니하므로 이같이 써서 그 청을 막으며 또한 뒤에 오는 이들에게 고하며 이른다.   

숭정기원 무오 여름(崇禎紀元 戊午)(1678년)
  문곡기인 김수항은 기록하다.<자료제공:최기욱 훈장>

水南寺記

月出山實羅季道詵師住錫地也 始詵公相之宜據山之正脈以設大伽藍則 所謂道岬寺也 又環山內外置蘭若以百數凡巖洞林麓之稍可以捿托者靡或遺焉 燧歲久湮廢今之存者不能什之一而其故基遺蹟之在觀記者猶歷歷可尋也 獨道岬之南循溪以上有一區峰回水抱地高而勢阻其形勝可與前所謂蘭若者相甲乙而蕪沒空曠未有稱焉 至崇禎丙申山人釋敏察而識之慨前之遺於是斬捺棘崖崿倡一二同志鳩財建屋佛堂僧房長齎告成又直其前爲樓數楹以便臨眺䂓制雖小儼然一祗園也夫自詵公以來迄今殆近千年矣 其間遊人釋子之經行於斯者亦何限而至敏而一朝始發之豈天慳而鬼秘之以隊其人歟地之隱顯固有時而亦可見敏之有法眼矣余竄于 南適在月出之下嘗携客到寺觴詠於樓上其幽霞滿灑令人樂而志歸微開拓之力 吾輩彦得以有此樂耶余又嘉敏之爲後人計者志勤而識慧也 時敏己入寂有老僧玉熱頗恬靜識文字爲余道敏事甚詳 余雖不及見敏觀於寺之創而己築其爲人及與烈語知其非妄言者然後益以信敏之非凡僧也 寺久無名以其南於道岬爲南菴余改名曰水南 其樓曰山翠以樓之四面皆山蒼翠常環合於此志實境也 烈仍請余一言以記之玆地也 不幸而不遭詵公蕪沒千百年之久幸而遭敏師得以開拓於千百年之後 其謂其矣若余之來游不在蕪沒之日而在開拓之後其亦幸也 非不幸也  斯不可不識聯書此以塞其請且以諗後來者云
     

崇禎紀元 戊午 季夏上澣
     文谷畸人  金壽恒  朗州疊舍 坎亨窩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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