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3)
■ 도갑리1구 죽정마을(6)

죽정마을 안용당의 가을 풍경 / 안용당과 필자와의 인연도 깊다. 나는 집주인의 권유로 안용당을 수리하여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별채로 사용했었다.
죽정마을 안용당의 가을 풍경 / 안용당과 필자와의 인연도 깊다. 나는 집주인의 권유로 안용당을 수리하여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별채로 사용했었다.

안용당과의 인연

필자가 죽정마을 안용당을 처음 보았던 때는 1998년 봄이었다. 아직 벚꽃이 피기 전이었으니 3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마을로 이사 온 직후였다. 10대 후반에 집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다가 16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고향인지라 이곳저곳이 몹시 궁금하여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곳이나 가보고 싶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무턱대고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광활한 모정마을 들녘을 지나 비구름이 산 중턱까지 내려온 월출산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구림마을 동계리와 신근정 사거리를 지나 죽정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오랜 수령의 벚나무 가로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나그네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가로수길 양옆으로는 짙푸른 보리밭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고 벚나무 가지에는 제법 부풀어 오른 꽃망울들이 빗물을 머금으며 개화를 꿈꾸고 있었다. 

대도시 서울의 거리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한적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풍경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을 걸으면서 느껴보고 싶었다. 공터에 차를 세우고 우산을 펼쳐 들었다. 벚나무 터널을 걸으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오른편 산기슭 아래 울창한 대숲에 둘러싸인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흔히 볼 수 있는 대숲이 아니었다. 소나무·동백나무와 어울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대문이 없고 마당이 굉장히 넓었다. 기역 자로 꺾인 한옥인데 규모가 크고 고풍스러웠다. 이끼가 낀 기와지붕만 봐도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택으로 짐작되었다. 인기척을 내보았으나 집에 아무도 없는지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홀로 옆 마당과 뒷마당을 둘러 보았다. 옆 마당엔 수백 년 묵은 동백나무들이 10여 그루가 서 있는데 수천 송이의 붉은 동백꽃이 대낮에도 불을 밝히고 있었다. 뒷마당에는 맹종죽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장관을 이루고 있고 그 왼편에는 왕대 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뒷마당에도 오래 묵은 동백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다. 고택을 중심으로 정면을 제외한 삼면이 울창한 대숲이요 동백나무숲이다. 봄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하늘을 가린 수십 척에 이르는 대나무숲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면서 서늘한 기운이 돌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접하는 신비스러운 대자연의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며 서 있는데 갑자기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면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고령의 어르신이었다. 황급하게 인사를 드리고 아름다운 집 풍경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구경 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올렸다. 그분은 당시에 한학에 정통한 최일석 선생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중 작설차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초의선사가 쓴 동다송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한글로 번역된 책은 읽어보았으나 한문 원본은 잘 모른다고 했더니 시간 날 때 오면 가르쳐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얼마 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약속이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안용당을 별채로 사용

안용당으로 진입하는 안길 바로 옆에는 최일석 선생의 둘째 아드님이 거주하는 집이 있었다. 그분의 함자는 최복이고 군서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 참 묘한 데가 있다. 사모님이 아내의 가까운 친척 언니였다. 아내는 그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 나로서는 처형이 한 분 생긴 셈이었다. 이후부터는 최복 이사장을 ‘형님’이라고 호칭하면서 깍듯이 모셨다. 

최일석 선생이 작고하신 후에 안용당은 주인 없이 일 년을 견디게 되었다. 집이 몹시 오래되고 낡은 관계로 당연히 관리가 어려웠다. 지붕에서 비가 새고 서까래 일부가 내려앉았다. 그러던 중 최복 형님이 필자에게 제안을 하나 하셨다. 안용당을 내가 수리하여 별채로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안 그래도 안용당 건물이 쇠락해가는 모습을 보기가 안쓰러웠는데 그런 제안이 들어오자 흔쾌하게 승낙을 하였다. 아내도 대찬성이었다. 의기투합한 나는 최복 형님과 함께 경운기를 끌고 진흙을 파서 실어다가 이겨서 기와지붕을 수리하였다. 마침, 구림 서호정마을 호은정 요사채가 무너져 있어서 헌 기와 수십 장을 실어 올 수가 있었다. 사다리를 수백 번 오르내리며 깨진 기와를 새로 갈았다. 무너진 서까래 다섯 개를 보수하고 기역 자 꺾어진 쪽에 툇마루를 놓았다. 보일러도 고치고 맨 오른쪽 방 아궁이도 새로 고쳤다. 벽지를 모두 새로 도배하고 세살문에 창호지도 새로 발랐다. 안용당 입구 오른쪽에는 돌로 축대를 쌓고 철쭉을 심었다. 한 달 동안의 공사가 끝난 후에 축대 위에 기념으로 금목서(만리향) 묘목을 심었다. 이때가 2000년 봄이었다. 지금 그 금목서는 우람하게 자라 내 키보다 몇 배 더 크다.

원문 백승돈 화백과의 인연

이렇게 하여 안용당을 2년 동안 별채로 사용하면서 살다가 2001년 가을에 한국화가인 원문 백승돈 화백을 잠시 손님으로 초대하여 영암 풍경을 마음껏 그릴 수 있도록 공간을 제공해드렸다. 원문 백승돈 화백은 안용당에 머무르면서 월출산을 비롯한 영암의 다양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 영암도기문화센터 2층에서 ‘영암의 산하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가 2001년 10월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 봄인 2002년 3월에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던 백승돈 화백은 안용당으로 거처를 옮겨 2003년 말까지 약 2년 동안 살게 된다. 백승돈 화백과 사모님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영암 안용당에서의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이제는 애틋하게 지내던 최복 형님도 돌아가시고 안 계셔서 예전처럼 안용당에 자주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처형이 굳건하게 집을 지키고 계셔서 아내와 함께 가끔은 찾아뵙는 편이다. 안용당은 영암에서 이름난 한옥민박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서울에서 온 체류형 농촌유학생 가족이 머물고 있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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