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2)
■ 도갑리1구 죽정마을(4)

월대암에서 내려다본 죽정마을 전경 – 5월 모내기 직전의 풍경이다
월대암에서 내려다본 죽정마을 전경 – 5월 모내기 직전의 풍경이다

어느 마을을 가도 그 마을의 구석구석을 지칭하는 소지명(小地名)이 있다. 원주민들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그 장소의 특징을 고려하여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고, 역사적인 배경을 품고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기념하여 지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화나 전설, 민담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난 지명들도 있다. 이 소지명은 외지 사람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원주민들에게는 마치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와도 같다. 그 마을의 소지명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토박이인지, 이주민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죽정마을은 천하의 명산인 월출산 기슭에 터를 잡고 있어서 그런지 역사유물과 문화유적이 매우 풍부하다. 흥미로운 전설과 민담도 많다. 따라서 죽정마을에는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소지명들이 마을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일찍 고향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그 마을의 어른들이 아니면 마을 속에 오롯이 깃들어 있는 소지명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죽정마을은 다행히 마을의 역사와 유래를 조사하여 남긴 소중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고(故) 최홍 어르신이 큰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최기욱 훈장님이 그 자료를 제공해 주셨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죽정마을의 소지명(小地名)

○ 가맷재
마을 북동쪽 통쇠 바위에서 북쪽 월암 마을로 넘어가는 언덕을 가맷재라 하며 부근에 기와를 굽던 기와 가마터가 있었다. 

○ 강담안 주막 터
영암에서 독천 가는 큰길 옆 양지마을로 들어오는 길가에 강담(돌담)으로 둘러싸인 주막이 있었는데 그 집을 강담안 주막이라 하였다.

○ 광산(鑛山)
봉바위 아래 도갑제 쪽에 일제 말(日帝末)에 형석(螢石)을 파내던 굴을 광산이라 한다.

○ 국장생(國長生)(지방 민속자료 제18호)
죽정마을 동쪽 수박등 구 도로 옆에 지상 1.2m의 네모 화강석에 “국장생(國長生) 태안육년경오삼월(太安六年庚午三月)”(1090년) 밑에 석표사좌(石標四坐)라고 새겨져 있다. 고려 선종 때 사찰 소유 토지 경계표(境界標)라 한다. 소전머리의 황장생(皇長生)과 내미리의 장생(長生) 외 또 하나가 더 있다는 데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갑산(道岬山)
월출산의 서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로 미왕재부터 도갑봉까지 도갑사에 모이는 골짜기 산을 도갑산이라 하여 도갑사 사찰림에 속한다. 현재는 월출산 국립공원으로 되어있다.

○ 도갑재(등성이)   
도갑사 쪽에서 강진군 성전면 죽전리로 넘어가는 등성이

○도갑제(道岬堤)저수지(貯水池)
마을 동쪽에 있는 봉바위 밑과 죽순봉 밑 석문거리에 1972년에 축조된 저수지로 죽정 뒷들과 월암, 월산 웃들과 평리 웃들을 몽리구역으로 하고 있다

○ 동구(洞口)
도갑사 밑에 있는 마을로 도갑사 전답을 경작하던 가구가 십여 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철거되고 없다.

○ 마(馬)가 집터
안바탕 분지 내에 있는 옛날 마씨(馬氏)가 살았다는 집터와 전답(田畓) 터가 있다.

○ 문산제(文山齌)와 양사제(養士齌)
마을 동남쪽에 있는 월대바위 아래에 있으며 옛날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암자(庵子)를 세워 문수암(文殊庵)이라 하였다는데 그 터에 구림 대동계(大同契)에서 성기동에 건립한 문산제(文山齌)와 양사제(養士齌)를 1832년에 옮겨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1966년에 철거되었다. 현재는 왕인박사 유적지로 지정되어 1986년에 복원되었다.

○ 미왕재 (억새밭)
구정봉에서 도갑사로 내려오는 곳에 있는 등성이로 넓은 억새밭으로 되어있다. 강진 무위사(無爲寺) 뒷 등성이며 헬리콥터장이 있다.

○ 민태쟁이 
양지마을 동쪽 수박등 북동쪽 산 밑 부근을 민태쟁이라 한다. 

○ 방천거리.
음지마을과 학암과의 경계에 둑이 있어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숫골에 있는 죽정제(竹亭堤) 여수로(餘水路) 둑이 되어있다. 죽정서원(竹亭書院)을 짖고 그 기가 세는 것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다고 한다.

○ 배틀굴과 미륵불 입상(彌勒佛 立像)
월대바위 아래 바위로 얽혀진 굴로써 바닥이 배틀을 차릴만한 공간이 평평하다. 굴 입구에 미륵불(彌勒佛)이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배틀굴을 “왕인 책굴(王仁 冊窟)”이라 하고 석불을 “왕인상(王仁像)”이라 하고 있다.

○보살정(菩薩亭) 
수박등 위 도갑사로 가는 삼거리 길옆에 고인돌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 바위 하나에 “관음보살정(觀音菩薩亭)”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보살할미집 터
음지마을 뒷동산에 있는데 당나라에서 보살할미가 건너와서 집을 짓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돌로 싸진 샘이 있다.

○ 봉(鳳)바위(부엉바위)
마을 동쪽 도갑사 가는 길 왼편에 우뚝 솟은 바위산 봉우리로 鳳의 머리 벼슬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봉바위 성터
봉바위 정상 부근에 언제 쌓았는지 모르는 성벽과 망대가 있는데 최근까지 돌화살촉이 발견되었다.

○ 봉창바위
봉 바위 산줄기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큰 바위로 바위 서쪽 중간이 사각형으로 바위에 이끼가 없어 먼 곳에서 보면 옛 초가집 봉창(들창)같이 보여 봉창 바위라 한다.

○ 봉화대(烽火臺)(무제등)
봉바위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산줄기 중간에 옛날 봉화대(烽火臺)가 있다. 최근까지 그곳에서 무제(기우제 祈雨祭)를 올렸다.

○ 삼효문(三孝門)
선인동(仙人洞)에 있는 김해김씨 김상윤(金相奫)과 김정묵(金正黙) 김성린(金成鱗)의 삼효 정문(旌門)이다.

○ 상견암(上見庵)(상견성암)
도갑리 대지 1번지로 미왕재에서 도갑사로 내려오는 길 우편 등성이에 있는 암자로 스님이나 처사들이 공부하는 수도암자로 경치가 절경이다.

○ 서원(書院)동산
음지마을 남쪽에 있는 뒷동산, 그 밑에 죽정서원이 있어 뒷동산을 서원동산이라 하고 있다.

○ 석문(石門)거리
마을에서 도갑사로 가는 길 중간쯤에 3m 정도의 돌기둥 2개가 서 있었는데 석문 양쪽에 축조 연대를 알 수 없는 석성(石城)이 있었다. 현재 도갑제(道岬堤) 뚝 무넘이 부근이다. 저수지를 막으면서 석문 돌을 묻었다.

○ 석성(石城)터
축조 연대를 알 수 없는 석성이 석문에서 시작하여 남쪽은 죽순봉 밑까지, 북쪽은 봉바위를 지나 월암 뒷산까지 이어져 있었다.

○선인동(仙人洞)과 고인돌
선인무수(仙人舞袖) 형국이라 하여 옛날부터 동리가 있었으며 김해김씨의 묘소와 삼효문이 있으며 큰길 아랫쪽 집 안에 고인돌이 여러 기가 있었는데 
현재는 2기만 남아 있다.

○ 수박등 
양지마을 동쪽에 도갑사로 가는 길가 등성이에 수박같이 둥근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부근에 고인돌과 국장생(國長生)과 장수 발자국이 있다.

○ 수채(水寨)
마을에서 도갑사로 가는 길 중간에 골짜기를 막은 곳. 

○ 안 바탕
도갑사 남쪽에 있는 큰 골자기 안에 있는 분지(버덩)로 옛날 집터(마가 집 터)와 전답 터가 있으며 입구에 남암(南庵) 암자 터가 있고 동원농장(東園農場)이 있다.

○ 안용당(安用堂)터
음지마을에 있으며 울창한 대숲이 장관이다.

○안주머리(들)(평야)
선인동(仙人洞) 북동쪽, 성양제(省陽堤) 위 넓은 들판, 안평대군의 묘가 있었다 한다  

○ 용수폭포(용사둠벙)
도갑사 대웅전에서 미륵전으로 가는 길옆 벽간정(碧澗亭) 밑에 있는 약 3m의 폭포를 용수폭포라 한다.

○ 월대(月臺)바위
마을 동남쪽 죽순봉 밑에 있으며 문산재(文山齋) 동북쪽에 사람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같은 바위로 위가 7~8평 정도로 평탄하며 전망이 좋다. 작은 황(凰)의 머리라고 한다.

○ 장수 발자국
수박등 길옆 바위에 어린아이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 정자등(亭子嶝)
영암 쪽에서 강담안 주막 터를 지나 양지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길가 등성이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어 정자등이라 하였는데 1960년대까지 폭 3m 이상의 뿌리가 있었으나 도로를 확장하면서 없어졌다. 현재 그 길은 양지마을 뒷길이 되어있다.

○ 주산등
도갑사 주산으로 구정봉에서 억새밭을 거처 도갑봉으로 가는 등선이 중간에서 도갑사로 뻗은 산줄기

○ 죽순봉(竹筍峯) 
마을 동남쪽에 있는 월대바위 남쪽 높은 봉우리로 봉바위와 마주 보고 있어 황(凰)의 머리라 한다.

○ 죽정서원(竹亭書院) 터
음지마을 남쪽 산밑에 있으며 함양박씨 낙남 선조 오한공 박성건(1418~1487)이 세운 서원을 죽정서원이라 하였고 1,600년대에 오한공을 모시던 사우가 있어 웃 사우(祠宇)라 하였으며 입구에 홍살문이 있었고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서원이 서구림 간죽정으로 이축되어 현재는 주춧돌과 댓돌만 남아 있고 뒷동산을 서원 동산이라 한다. 

○천자(千字)바탕
서원 동산에서 문산제(文山齌)로 가는 길 시냇가에 조금 평평한 곳으로 천자문 공부를 하는 어린 학동들이 아침에 문산제로 가면서 모여 복습하는 소리가 낭낭하던 곳이다.

○ 통쇠바위 
민태쟁이 동북쪽 봉창바위 아래 자물쇠통같이 생긴 바위가 여러 개 있어 부근을 통쇠바위라 한다. 현재는 바위가 몇 개 안 남았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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