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1)
■ 도갑리1구 죽정마을(2)

죽정마을 전경과 돌담길  마을회관 입구에서 바라본 죽정마을 전경. 
죽정마을 전경과 돌담길  마을회관 입구에서 바라본 죽정마을 전경. 

2017년 당시 죽정마을 노인회장이셨던 최홍 어르신에게 죽정마을의 역사와 풍속에 대해서 청해 들은 적이 있다. 다음은 그때 기록한 내용이다.

중국에서 온 보살할미와 문수암 문산재 터

“월대암과 문산재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문곡 김수항 전집을 보니까 남암이라고 하는 도갑사 암자가 있었다고 해요. 낭주최씨 제각 안에 있는 남암골이 바로 남암의 터라고 봐요. 나중에 문곡이 남암을 수남사로 이름을 바꾸었고요. 남암골을 안바탕이라고 하는데 그 안바탕 들어가는 곳에 있는데 터만 남아 있다요.

그리고 문산재도 원래는 문수암이라는 암자였어요. 문수암 이전에는 보살할미가 살아서 보살할미 집터로 알려져 있지요. 원래는 보살할미가 청룡끝 대밭 자리에 살았었지요. 그 자리에 우물이 있어요. 사철 우물이 마르지 않아요. 우물도 돌로 네모반듯하게 짜져 있지요. 지금도 남아 있는데 대숲이 무성해져서 그 속에 묻혀있지요. 그렇게 대숲이 우거진 터에서 보살할미가 살다가 나중에 문수암으로 이전했다고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지요. 

문수암에는 원래 우리가 알기로 탑과 돌부처가 있었지요. 문산재는 원래 동구림리 성기동 현재의 왕인박사유적지 사당 앞 동네에 있었고요. 구림 대동계에서 성기골에 문산재를 지어서 운영해 왔다고 해요.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에 문수암 절이 없어져 버리니까 그리로 옮긴 것이라고 하죠. 즉 원래 성기골에 있었던 서당 문산재를 문수암터로 옮긴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보살할미가 살다가 나중에 문수암이 생겼고 후에 문수암이 없어지자 성기골에 있던 서당을 문수암터로 옮겨 현재의 문산재가 된 것이지요.

죽정 냇가와 돌담길
 

“죽정마을 돌담이 참 운치가 있습니다. 돌담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요 앞 개천물이 지금은 짚은디 옛날에는 다리 없이 그냥 건너다녔어요. 개울이 얕아서 애기들도 멱감고 수영하고 놀았지요. 소구루마가 그냥 건너다닐 정도로 얕았어요. 큰물이 지면 사람이 내왕도 못하는데, 하루 이틀만 지나도 물이 그냥 빠졌지요. 1962년도에 다리를 놓으면서부터 그리로 다녔지요.

도갑 계곡에서 물이 많이 내려오다 보니까 산에서 센 물줄기 따라 돌이 많이 떠내려 왔어요. 도시에서 온 애기들이 누가 이리도 돌이 깨끗하게 닦아 놓았냐고, 이끼도 없이 이렇게 반질반질하냐고 가끔씩 물어볼 정도로 돌이 번쩍번쩍 했지라. 큰물이 지고 나면 돌멩이가 깨끗해진 거제라. 센 물살에 떼굴떼굴 구름시로 즈그들끼리 부딪치고 씻기고 하면서 동글동글해지고 그랬제라.

우리 마을은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오니까 바작으로 져다 나르고, 그 돌로 담을 쌓았제라. 돌담이 많았는데 새마을운동 하면서 돌을 다시 냇가에 깔았다고 합니다. 새마을운동 한다고 동네 길 넓히면서 돌담을 많이 헐어 냈제라. 그때 돌담이 다소 없어졌다고 하는데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많습니다. 나중에 다시 돌담을 쌓은 집도 많았으니께요.

그러고 나서 다시 하천 정비하면서 바닥을 포크레인으로 쳐내버리고 해서 냇갈이 깊어졌어요. 옛날에는 번번하니 하천부지가 상당이 넓었는데 지금은 많이 좁아졌다고 봐야죠. 돌담이 여그 동네에서 나온 돌을 사용해서 그대로 쌓은 것이라 자연스럽고 정겨운 느낌이죠. 깬돌이 아니라 여그 냇가에서 주워온 돌멩이고 앞마당 뒷마당에서 나온 돌멩이 당게요. 우리 마을 돌담은 최근에 문화재로 등록되었어요. 우리 마을 자랑입니다.

죽정마을 차례의 유래

“죽정마을에서는 차례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차례(茶禮)를 지낼 때 차(茶)를 올렸지요. 차가 없으면 정화수를 올렸습니다. 그란디 정화수는 정성이 덜 들어간다고 해서 술을 빚어서 올렸다고 합니다. 원래는 차를 올려서 제를 모시기 때문에 차례·다례라고 했어요. 일년에 네 번 올렸다고 그래요. 오월 단오, 추석, 시월 상달, 그리고 정월 초하루, 지금은 약해져서 일 년에 두 번 차례를 모시고 있제라. 추석하고 설날에. 옛날에는 단오에도 차를 올렸어요.

“차례 지낼 때 다식도 곁들어 내었는가요?” 차에 따르는 음식이라 당연히 올렸죠. 시제와 제사 때 다식을 다 올렸습니다. 지금이니까 다식이 없어져 부러서 안올릴 뿐이지요. 시류에 따른 것이지요. 다식은 나무판에 찍어서 먹기 좋게 만들어서 먹었지요.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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