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60)
■ 도갑리2구 평리(坪里)마을②

평리 선장목적을 화제(畫題)로 삼아 그린 벽화 – 출처: 모정마을 벽화의 거리
평리 선장목적을 화제(畫題)로 삼아 그린 벽화 – 출처: 모정마을 벽화의 거리

선장마을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

선장리는 월악동과 더불어 평리마을을 구성하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뜻밖에도 평리의 이웃 마을인 모정마을에서 발견된다. 필자가 살고 있는 모정마을에는 마을 동쪽 호숫가에 원풍정이라고 하는 운치 있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기둥이 열두 개인데 각각의 기둥마다 기둥이 향한 곳의 풍경을 읊은 주련이 걸려 있다. 이 중 하나가 선장목적(仙掌牧笛 선장마을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이다. 옆 기둥의 주련인 월산반조(月山返照 월출산에 비치는 저녁노을)와 대구(對句)를 이룬다. 월출산과 평리마을을 가리키는 동쪽 방향의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들이다.

원풍정 마루에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월출산을 바라보며 쉬고 있노라면 너른 들녘 어디선가 아련히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면 선장마을 목동이 소 등을 타고 들길을 걸으면서 여유롭게 피리를 불고 있다. 이 얼마나 목가적인 풍경인가? 

일소가 없어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주민들은 이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마을 한 골목에 대형 벽화를 그려놓았다. 

갈쿠나무의 추억

한편 평리마을 주민 박석수(78) 씨에게 옛날 이야기를 청해 들어보았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는 열 살만 넘어도 나무하러 다녔어라. 꼴망테 어깨에 메고 낫 한 자루 들고 꼴 베러 다니는 것은 예사였고. 그 풀로 소 키우고, 짐승들에게 돌아가면서 밥 주고 물 주는 것은 일상이었제라.

나무하러 가기로 날 잡은 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짐을 챙겨요. 대나무 석작에다 어머니가 싸주신 꽁보리밥, 그 오묘한 밥맛은 아직도 잊지 못하지라. 지게 바작에 낫과 작대기까지 챙겨서 나이 15세만 넘으면 떼 지어서 나무하러 다녔지요. 주로 검불과 먹달 갈쿠나무였지라. 혹시나 솔나무나 참나무를 베면 큰일나부러요. 산을 지키는 산감에게 다 빼앗겼당게요. 

갈쿠나무는 솔가지와 솔잎을 말해요. 갈쿠질 한다고 해서 갈쿠나무라고 하지라. 마른 솔잎이 얼마나 잘 타겄소? 가을에 단풍이 들면 솔잎이 노랗게 물들어서 떨어지지요. 그것을 갈쿠로 긁어서 망태나 차두에 담아오는 것이지라. 학교 파하면 애기들이 수대로 소나무 동산에 가서 갈쿠나무 해오는 굿이었지라. 소나무 동산 주인 만나면 망태 어깨에 걸치고 갈쿠는 손에 들고 고무신 벗겨진 줄도 모르고 내빼곤 했지라. 잽히면 혼나부요. 갈쿠나무도 다 뺏겨불고. 

어쩌다 맹감나무라도 발견해서 가시 찔릴까봐 조심조심 꺾어서 가져오면 누이들이 맹감 열매 따먹은다고 달려 나오곤 했지라. 그란디 지금은 불 땔 일 없고 물 질러 나를 일 없는 참말로 좋은 시상에 살고 있지요.”

평리마을의 선돌

평리마을 당산나무인 400년 수령의 팽나무와 선돌 – 간척지가 생기기 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올 때 배를 맸던 돌이라고 한다.
평리마을 당산나무인 400년 수령의 팽나무와 선돌 – 간척지가 생기기 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올 때 배를 맸던 돌이라고 한다.

평리마을 당산나무 주변에는 6기의 선돌이 나란히 서 있다.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지남들이라고 하는 간척지가 조성되기 전에 배를 맸던 돌이라고 한다. 평리마을이 고향인 박종대 군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평리마을 하면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었던 6그루의 미루나무(이곳 주민들은 버드나무라고 부른다)와 평리고약이 유명했었지요.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그리고 원래 7기의 선돌이 있었어요. 1970년대 경지정리를 하면서 땅속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겨났어요. 한 해에 40대 초반의 남성들이 다섯 명이나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의논을 한 끝에 굿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 선돌을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주민들이 혼신의 노력 끝에 땅속에 묻혀 있던 돌을 다시 찾아서 파냈습니다. 하지만 한 기는 끝내 못 찾았습니다. 주민들은 마을 앞 논두렁에 6기의 돌을 세웠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마을 앞으로 영암-독천 간 4차선 도로가 개설되면서 선돌 6기가 다시 훼손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요. 나를 포함하여 주민들은 절대 그 돌을 땅속에 묻거나 훼손하지 못하게 했지요. 그리고 현재의 당산나무인 팽나무 아래에 나란히 세워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00년 수령의 저 팽나무도 주변에 석분을 깔아분 탓에 시름시름 죽어갈 때 내가 산림과에 말해서 석분을 파내고 주변을 정리한 다음에 거름을 주었더니 다시 살아나서 지금처럼 저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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