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마을의 봄 / 봄이 오면 평리마을은 유채꽃으로 물든다. 마을 주변은 온통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월출산 백 리 벚꽃 길과 꽃잔치를 벌인다. 하얀 벚꽃과 노오란 유채꽃의 만남은 상춘객들의 마음을 들뜨고 설레이게 한다. 평리마을은 점차 유채꽃 피는 마을로 명성을 얻어 가고 있다. 
평리마을의 봄 / 봄이 오면 평리마을은 유채꽃으로 물든다. 마을 주변은 온통 노란색으로 채색되어 월출산 백 리 벚꽃 길과 꽃잔치를 벌인다. 하얀 벚꽃과 노오란 유채꽃의 만남은 상춘객들의 마음을 들뜨고 설레이게 한다. 평리마을은 점차 유채꽃 피는 마을로 명성을 얻어 가고 있다. 

월산삼거리에서 벚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월악동 표지판이 보인다. 옛날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7가구가 살고 있다. 구림마을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평리마을과 죽정마을 회전교차로가 나온다. 동쪽 월출산 방향으로 가면 죽정마을이고, 서쪽 모정마을 방향으로 가면 평리마을이다. 우선 평리마을부터 가보기로 한다. 

너른 들녘 한가운데 자리 잡아

평리마을은 평리, 월악동, 선장리로 이루어졌다. 평리마을은 그 이름 속에 지명유래를 담고 있다. 말 그대로 평평한 평야 가운데 터를 잡았다. 사방이 모두 너른 들녘이다. 원래부터 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현재의 마을 앞까지 영산강물이 넘나드는 갯벌이었다. 마을이 형성된 것은 선산임씨 임구령 목사의 간척지 조성 후였다. 나주목사 월당 임구령(1501~1562)은 1540년에 동호리와 양장리 원머리 사이에 제방을 쌓아 ‘십리평야’ 간척지를 조성했다. 이로써 모정리, 양장리, 동호리 삼리에 이어 평리마을도 지남들을 경작하는 마을로 남게 되었다. 

월악동에 고인돌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청동기 시대부터 바닷가였던 월악동에 먼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때 진남제를 축조하여 간척지가 만들어지자 사람들이 들녘 가까운 곳으로 점점 이주하면서 월악동마을 규모는 작아지고 평리마을은 번성하게 된 것이리라. 

현재 45가구 9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영암·독천 간 4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교통 편의성이 증진되었다. 도로 아래 마을 입구에는 수년 전 국립종자원이 들어서 있다.

평리마을 입향조는 남은처사 조세풍

평리 마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으로 기록된 사람은 창녕조씨 남은처사 조세풍이다. 영암의 창녕조(曺)씨들은 주로 영암읍을 비롯하여 군서, 시종, 미암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부제학공파 후손들이며, 이곳 입향조는 부제학 조상치의 6세손으로 남은처사(南隱處士) 조세풍 선생이다.  

현재 영암읍 낭주사(朗州祠)에는 남은처사 조세풍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남문로 22-10)

“남은처사 조세풍은 당초 경상도에서 살았으나 당시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1580년 조상의 땅을 버리고 영암으로 와서 현 군서면 도갑리 평리마을에 강당을 짓고 인근 강진, 해남 등지의 청장년과 선비 수백 명을 규합하여 학문 연마에 심혈을 기울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령을 돌보지 않고 솔선하여 문하생들과 군수물자 보급에 헌신했다.

정유재란 때는 문하생 100여 명과 의병을 조직하여 강진 도암 병치제 전장에 출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았으나 후에 전상의 후유증과 노령으로 별세했는데 향인들은 '남은처사'라고 불러 나중에 호(號)가 되었다.”
( 출처 : 영암의 성씨기행-창녕조씨편)

현재는 함양박씨, 경주이씨, 김해김씨 외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확 트인 들녘 풍경에 교통까지 좋아져서 마을에 식당도 생기고 전원주택도 늘어나는 추세다. 

유채꽃 피는 마을로 명성 얻어

평리마을은 몇 년 전부터 경관 작물로 유채를 대단위로 재배하여 4월에 벚꽃이 진 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월출산을 뒷배경으로 하고, 사방의 너른 들녘을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이 평리마을은 그야말로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유채꽃밭에 들어가 꽃향기를 즐기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평리마을은 점점 유채꽃 피는 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한편 평리 회전교차로에서부터 마을 입구까지 배롱나무 가로수를 심어 여름에도 꽃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봄에는 벚꽃과 유채꽃, 여름에는 배롱나무꽃, 가을에는 황금들녘으로 철마다 색깔을 바꾸는 평리마을은 영암의 대표적인 생태마을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평리 월악동 고인돌

평리마을에도 원래 바닷가였던 관계로 역시나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여러 기 발견된다. 죽정마을과 구림마을도 여러 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다. 영산강과 맞닿는 구릉을 따라 띠처럼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경지정리와 도로개설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많은 고인돌이 보존되었을 것이다. 월악동 고인돌과 관련하여 2009년 2월 24일 자 영암신문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평리(월악동) 마을의 가장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용주 씨 집 뒤편 밭과 월악동에서 평리로 가는 소로의 경계 지점에 1기의 지석묘가 있다. 상석의 규모는 190×150×50cm 정도로 장축 방향은 동-서이다. 상석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지석 1개가 있다. 모정마을 100여m 못 미쳐 좌측으로 25m 지점의 감나무 과수원과 논둑에 위치한다. 경지정리로 인하여 상석이 이동되어 한 곳에 모아졌기 때문에 확실한 기수는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조사된 4기 이상의 상석이 확인된다.”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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