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53)
낙안촌(洛雁村)

건넷말 유선각에서 바라본 낙안마을 전경
건넷말 유선각에서 바라본 낙안마을 전경

낙안마을은 원마산 서쪽, 신마산 북쪽에 자리하며 마산리 3구에 속한다. 1981년 영산강하구언을 건설하기 이전에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지금의 건넷말(마을 서쪽 건너에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1890년대 신덕정에서 살던 광산김씨와 김해김씨가 마을 위쪽 ‘웃데미’에 터를 잡고 정착한 후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현재 광산김씨, 김해김씨, 해남윤씨 등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 

낙안마을 지명유래

낙안마을이라는 명칭은 풍수지리상 평사낙안(平沙落雁) 형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평사낙안은 ‘넓은 모래들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형국’을 뜻하는 말이다. 영산호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 앞에 너른 모래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월출산 기슭에서 하천을 따라 내려온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모래사장이었다. 모래사장 너머로는 광활한 갯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기러기는 겨울 철새고 철새들이 이곳까지 수만 리를 날아온 이유는 먹을 것이 풍부한 갯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 웃데미에 터를 잡은 주민들은 수많은 기러기들이 떼를 지어 모래사장과 갯벌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낙안(落雁)이란 이름이 생겨난 이유이다.

평사낙안(平沙落雁) 용어의 유래

한편 평사낙안이란 말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이 말은 중국 후난성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류하는 곳의 8가지 경치를 읊은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소수와 상강은 중국 후난성 동정호(洞庭湖)의 남쪽 영릉(零陵) 부근을 말한다. 즉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소수와 상강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대표적인 8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평사낙안은 그중 4번째 풍경이다. ‘소상팔경’은 다음과 같다.

1) 소상야우(瀟湘夜雨, 영주시(永州市) 동쪽)-소수와 상강에 밤에 뿌리는 비
2)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동정호에 뜬 가을 달
3) 원포귀범(遠浦歸帆, 상음현(湘陰縣))-먼 포구에서 귀환하는 돛단배
4) 평사낙안(平沙落雁, 형양시(衡陽市) 회안봉(回雁峰))-모래사장에 앉은 기러기
5) 연사만종(烟寺晩鐘, 형산현(衡山縣) 현성(縣城))-안개 낀 사찰에서 들리는 저녁 무렵의 종소리
6) 어촌석조(漁村夕照, 도원현(桃源縣) 무릉계(武陵溪))-어촌의 저녁에 비치는 석양
7) 강천모설(江天暮雪, 장사시(長沙市) 수륙주(水陸洲))-강가에 저녁 무렵 내리는 눈
8) 산시청람(山市晴嵐, 상담소산(湘潭昭山))-산속 저자에서 피어나는 푸른 남기
 

안견(安堅)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中
안견(安堅)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中

소상팔경(瀟湘八景)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소상팔경’은 나중에 시와 그림의 주제로 많이 다루어졌다. 중국에서는 북송(北宋)의 이성(李成)에 의해 처음으로 「소상팔경도」가 그려졌고, 송적(宋迪)도 이른 시기에 ‘소상팔경’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져 큰 영향을 미쳤다. 소상팔경을 주제로 하여 문인들은 시를 지었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고려 명종은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을 소재로 글을 짓게 하고, 이광필(李光弼)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 이제현(李齊賢) 등 여러 문인들도 소상팔경시를 남겼다.

조선 세종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이 화가를 시켜 「소상팔경도」를 그리게 한 바 있고, 16세기에는 안견파(安堅派) 화가들이 빈번하게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등이, 후기에는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최북(崔北), 김득신(金得臣), 이재관(李在寬) 등의 작품이 현전하고 있다.

필자의 고향인 모정마을에도 원풍정 12경이 있는데 그중에서 지남야우, 덕진귀범, 갑사모종, 연당추월, 은적청람, 월산반조 등이 소상팔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동팔경이나 단양팔경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윤천수 옹과의 대화

마을주민 윤천수 옹(90)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는 원래 시종 신학리에서 살다가 약 50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소. 본관을 말할 때 본시 해남 윤가인데 신학 윤가라고 합니다. 처음 왔을 때는 바닷물이 동네 앞까지 밀려들었었지. 저기 건넷말은 서쪽으로 둑을 쌓아 수로를 만든 후에 생긴 마을이오. 건넷말 유선각 바로 곁에 샘이 있었어요. 그 물을 식수로 썼는데 짠 기가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논이 별로 없어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나갔지요. 여자들은 뻘밭에서 맛과 조개를 잡았었지요. 영산강하구둑이 생긴 후부터 농토가 늘어나 주민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바닷가 마을이라면 정월 대보름 때 풍물을 치고 샘굿도 하고 당산제도 모셨을 텐데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나요?”

“한 20년 전까지도 대보름이면 풍물을 울리고 했는데 상쇠 어른이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맥이 끊어졌어요. 지금 40호가 조금 넘는 규모인데 누가 들고 일어나 할 사람도 없고... 지금 시골이 다 그렇지요. 대부분 노인들만 남아 살고 있으니...”

자식들도 모두 대도시로 나가 살고 있는데 거의 매주 한 번씩은 고향마을에 들러 집안일을 보살피고 간다고 한다. 정원에 화단을 조성하여 여러 가지 화초를 정성스럽게 가꾸고 계신다. 작별 인사를 올리고 신마산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월출산 위로 유영하는 구름이 시골 어른들의 흰 머리처럼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월인당 농촌유학센터장)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